1934년작 <청춘의 십자로>가 발견되어 일본으로 보내져 복원되었고, 한국영상자료원이 곧 대중에 공개할 것이라는 신문기사를 아침식탁 위에서 읽고 난 며칠 후, 난 김태용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형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고 있다는 둥 아부성 문자를 이미 보내놓은 터라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김태용 연출, 오류미 작가, 김한내 조연출, 그리고 나는 그날부터 하루 12시간씩 영화를 돌려보고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실린 대강의 줄거리를 토대로 각각의 화면에 들어맞는 변사대본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작업이었다. 쉬는 시간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정말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끝이 보이지 않는 고되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총 러닝타임 70여분. 하루 12시간 정도 작업하면 약 7분 정도 대본을 짜니, 그렇게 열흘을 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고, 그렇게 짠 것도 마음에 꼭 드는 것이 아니니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제대로 된 연습은 도대체 언제 한단 말인가?
그러고 있는 한편엔 박천휘 음악감독이 동병상련하고 있었으니, 거의 전체적으로 깔리는 모든 음악과 노래를 홀로 작사 작곡하느라 연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의상을 맡은 조상경씨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바쁜 스텝 중에 한 분일 텐데, 이전까지는 태용 형을 몰랐다가 형이 다짜고짜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하니 열일을 제쳐두고 달려오셨다.
우리가 막바지 대본작업을 하고 있을 즈음, 다른 연습실에선 따끈따끈한 악보를 들고 음악연습이 한창이다. 키보드, 바이올린, 아코디언, 콘트라베이스, 그리고 남녀 두 가수분들.
아, 또 있다. 바람잡이들. 공연전 관객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킬 우리의 전위부대.
한국영상자료원 개관기념 영화제 개막공연은 그렇게 준비되었다. 그 후 같은 장소에서 이틀 더 공연되었고, 제천영화제, 충무로영화제, 파주 헤이리 축제, 부산영화제에 초청받아 공연되었다. 그 외에도 국내외 많은 기획자분들이 이 공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아직 <청춘의 십자로>를 박물관으로 보낼 생각이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공연하면서 ‘내 중심의 이동’을 경험하였다. 처음에 내 중심은 분명히 문자텍스트, 즉 우리가 구성한 변사대본에 있었다. 그 후 음악에 내 중심을 맡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고, 그 다음에는 화면, 70여년 전에 만든 낡은 무성영화가 내 중심에 있었고, 마지막 내 중심은 관객들과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