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원에서의 이중생활

by.신한솔(영화감독) 2008-11-13조회 699
신한솔

나에게 영상자료원은 뭐랄까… 좋은 선생님과 나쁜 친구들로 가득한 여름학교 같은 거였다. <싸움의 기술>으로 입봉하기 3년 전 뜨거운 여름, 서초동 영상자료원은 영화감독을 꿈꾸던 어린 나에게 한때의 직장이자, 아지트였다. 상암에 마련한 신사옥의 ‘쌔끈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서초동 임대 건물 시절 영상자료원의 단출하면서도 궁색해보이던 시사실이 벌써 그리워지기도 한다. 건물 입구 부터 필름냄새와 소독액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던 고전적 정서가 말이다. 7개월 동안 내가 맡았던 일은 한국 영화사에 있어 남길 만한 인물을 선정하여 <영화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정창화, 한형모, 이강천 감독님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선배 영화 감독님들의 작품을 하나하나 챙겨보면서 일본의 고전 감독들만 흠모했던 내 자신의 무지가 부끄럽고 죄송했던 기억이 난다. 또 하나 즐거웠던 기억은 일을 핑개대고 보고 싶은 필름을 자료실에서 꺼내 볼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남들 퇴근 후 텅 빈 자료실에 몰래 들어가, 어린 시절부터 흠모했던 정윤희, 장미희, 이미숙, 유지인, 윤여정 선생님 등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부서질 듯한 그들의 젊은 온 몸을 필름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흥분되는지 모를 것이다. 역시 영화는 은밀하게 보는 맛이다. 내 두 번째 장편영화인 <가루지기>에 구석구석 그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를 감추어 놓았으니 나중에 즐겨보시길 바란다. 생소한 자극과 흥분을 일깨워주었던 영상자료원, 좋은 선생님이자 나쁜 친구로 가득한 매력적인 공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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