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의 공간, 상상의 공간 <스캔들>,<취화선>,<혈의누>,<음란서생>으로 본 현대 사극 미술

by.최소원(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 2008-09-01조회 3,761

사극은 당대의 정서와 감각에 맞게 역사를 재현하고 상상한다. 그 중 시각적 상상을 맡은 미술은 사극의 ‘새로운 비주얼과 때로는 스펙타클’로 관객을 매혹시키는 임무를 맡은 중요한 분야이다. 한국영화박물관은 최근 제작된 대표적인 사극 네 편이 보여주는 시각적 상상력에 주목한 기획전시 ‘사극의 공간, 상상의 공간’을 통해 현대 사극 미술의 흐름을 짚어본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는 서양음악에 맞추어 사극배우들이 움직일 때 생기는 충돌의 느낌이 재미있겠다는 이재용 감독의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1790년대 정조 말기라는 혼란의 시기에 유교관습과 팽배해진 시대적 변화에 대한 욕망의 충돌을 조선 사대부의 성문화 속에 담았다. 미니멀한 스타일의 의상디자이너로도 잘 알려져 있는 미술감독 정구호가 창조한 정교한 디테일이 살아 있는 화려함은 욕정, 질투, 사랑, 배신의 보편적 감정들이 얽힌 드라마에 역동성을 부여했다. 특히 조선시대 시대극에 대한 통념을 깨고 진한 빨강을 쓰지 않은 의상 디자인은 이후 전통 의상을 응용하는 범위가 훨씬 넓어졌을 정도로 신선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극적 긴장감은 연출은 물론이고 필터 없이 촬영을 했을 정도로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꽉 찬 절제미가 한 몫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2001) 역시 조선 말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천재 화가 장승업의 예술혼과 인생 역정을 보여주기 위해 장승업의 삶의 공간의 재현에 중점을 두었다. 양수리 종합촬영소에 2,765평에 이르는 대형 오픈 세트를 제작하고 예산의 1/3을 쏟아 부은 데에는 장승업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생활했던 시전거리, 지전, 화방, 주막 등의 구체적인 생활 터전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MBC 미술센터의 주병도 미술감독의 오픈세트 설계도와 스케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방대하다. 종로 대로통, 기생촌 지역, 허름한 주막과 중인의 주막, 초가로 된 상가와 기와를 얹은 상가, 난시장 밀집지역과 육교화방, 고급지전, 그리고 서민의 정취가 가득한 피맛골 등은 옛날 방식 그대로 지어졌고 이러한 미술부의 노력이 생동하는 화가 장승업을 스크린으로 불러냈다.

고어적인 살인 장면이 등장하는 스릴러 사극 <혈의 누>(2005)의 비주얼은 많은 영화팬들의 뇌리에 남아있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조선 연쇄살인사건’을 콘셉으로 기획된 김대승 감독의 데뷔작으로 조선 말기 각 계층의 부를 둘러싼 욕망이 야기한 격렬한 사회 변동을 극단적으로 압축시켜 동화도라는 욕망의 소용돌이 공간을 만들었다. 민언옥 미술감독은 과잉과 탐욕으로 넘실대는 가상의 섬 동화도를 시각적으로 창조하기 위해 로케이션에만 6개월을 썼다. 비뚤비뚤 흘러내리듯 지어진 초가집들 사이로 하늘을 찌를 듯 섬뜩하게 솟아있는 기다란 장대들이 가득한 기괴한 느낌의 포구와 마을은 인물들의 심리를 드러내며, 부를 대량생산하는 제지소 건물에 어지럽게 얽혀있는 도르래와 기중기, 지게와 수레는 스릴러물의 긴장을 고조시킨다.

김대우 감독의 데뷔작 <음란서생>(2006)은 ‘화면은 심각하지만 내용은 코미디’인 변종 시대극을 만들고자 ‘콘트라스트가 강한 느와르풍의 사극’을 창조했다. <장화, 홍련>, <형사 Duelist> 등에서 깊이 있는 공간감과 색감을 보여준 조근현 미술감독은 검정과 적색을 기본으로 하고 상상에 의존하기 보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하려고 애썼다. 조선시대 명망있는 문장가인 사대부 선비가 결국 저잣거리 야설가의 길을 걷게 되는 설정을 위해서는 오히려 더 우아한 미술이 뒷받침되어야 점잖고 가식적인 선비와 노골적인 밑바닥 문화의 대비가 부각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조선시대를 재현한 아름다운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우아한 미술이 주는 설득력은 올 곧은 선비가 음란소설을 통해 삶의 ‘진맛’을 깨달아 가는, 겹겹의 가식을 한올한올 벗겨가는 과정의 재미를 증폭시킨다. 조근현 미술감독은 시치미를 떼면서도 엽기적이고 코믹한 대사가 흘러나오는 <음란서생>을 위해 철저하게 고증을 따르려고 애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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