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모] 신여성에서 현모양처로 한형모 감독 영화의 여성

by.김선아(영화평론가) 2008-08-28조회 2,954
운명의 손

한형모 감독 영화의 첫 번째 특성은 ‘적기성 適期性’에 있다. ‘적기성’이란 당대의 지배 이데올리기뿐 아니라 당대 영화의 유행과 근대성이 가져온 풍조, 세태, 습속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빠르고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는 그의 영화를 아우르는 용어이다. 특히나 그가 주력했던 ‘여성영화’ 여기에서 ‘여성영화’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여성의 삶을 서사로 만든 영화를 말한다. 여성주의 문제의식과 대안적인 재현 및 서사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여성주의 영화와는 구별된다.는 당대의 생활 세계에서 펼쳐졌던 미시적 삶을 면밀하게 담고 있어서 그의 적기성이 가장 뛰어나게 발현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그의 영화의 특징은 ‘여성과 근대’의 관계를 다룬 현대물에서 특히 뛰어난 적기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여성은 근대에 ‘현모양처’라는 전통적 이데올로기의 훈육을 받는 수혜자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한형모 감독의 여성영화에는 당대의 여성을 계몽하고 훈육하여 근대의 밝은 빛을 맞이하는 것이 결국 한국 근대화를 성공으로 이끄는 핵심 고리라는 사고가 내재해 있다. 다시 말해서 서구화와 민족주의화를 비롯한 모든 이데올로기적 가치가 무너진 한국의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건 서구화되어 있는 여성의 정체성을 전통적인 ‘현모양처’ 정체성으로 개조시키는 일이었다.

한형모 감독은 <정의의 진격>에서 <운명의 손>으로 넘어가던 시기 즉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장르를 옮겨가면서 본격적인 ‘여성 영화’의 길을 가게 된다. 이들 영화에서 여성은 빠른 속도로 재편되고 있었던 근대의 가치와 감각을 선취하고 있다. 위기감을 느끼고 혼란스러워 하는 남성들과는 대조적으로 여성은 경제적인 면과 성적인 면 모두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적극적으로 원했다. 한형모 감독의 여성영화는 이러한 여성의 근대적 욕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억압한다. 여기에서 한형모 감독의 여성영화가 지닌 양가성과 모순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카메라 뒤의 도덕 교사

한형모 감독의 영화에서 특히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여성영화의 경우, 대중음악 등 당대의 대중문화를 시기 적절하게 담아내는 그의 적기성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라는 또 다른 지배 이데올로기가 출현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는 식민지 시대와 냉전 시대 그 위에서 근대의 삶의 양식을 갖춰야 했던 한국의 상황에서 요구된 이데올로기였고, 생활 경제 및 사적 경제 영역, 미시적 삶, 습속의 층위에서 준거틀을 제시하는 시기에 도래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일상으로 다가오는 근대를 파악하고 조율해야 할 때 여성은 어떤 삶의 습속을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했고, 한형모 감독은 여기에서 카메라 뒤를 지휘하는 도덕 교사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영화라는 교과서를 통한 그의 가르침을 보고 스스로가 망각하거나 잊고 있었던 전통적인 여성의 가치를 깨달아야 하는 학생이 된다. <자유부인>에서 오선영이 춘호가 찍은 사진의 대상이 되거나 <언니의 말괄량이>에서 나온 현상되지 못한 자매의 사진처럼 그의 영화에서 여성은 거의 근대의 대중매체의 주체가 아니라 스펙터클의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0년대 중반 한형모 감독의 말기 작품들인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와 <엘레지의 여왕>은 점점 더 많은 스펙터클로 둘러싸여 있는 현실 속에서 여성의 가치를 주장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이미자는 한형모 감독이 제시한 일종의 여성의 역할 모델이자 그가 여성영화를 통해 일생 동안 추구했던 상징적 우상과도 같다. 스펙터클이라는 이미지의 지위를 고수하면서도 현모양처라는 전통적인 지위 또한 갖추고 있어야 했던 여성, 아버지와 지아비를 섬기는 가수,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면서도 인고의 세월을 견딘 전통적인 한국 여인네 상을 고수하고 있는 이미자의 이미지가 바로 그가 염원했던 여성상이었던 것이다.

여성의 운명의 손

한국 전쟁 이후 한형모 감독이 만든 <운명의 손>은 그의 이후 영화들에서의 주인공 여성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윤인자)은 마가렛이기도 하고 정애이기도 하며 양공주이자 간첩이기도 한 여성이다. 그녀는 신영철(이향)을 사랑하지만 그가 남한의 육군대위라는 걸 알게 되면서 자신의 간첩활동에 갈등을 느낀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마가렛은 영철을 대신해서 운명의 손이 쏜 총에 의해서 죽게 된다. 물론 이 영화는 반공 영화답게 사랑할 수 있는 자유와 자신의 자유의사를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남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반 공산주의적 발언이 계속 등장한다. 그러나 한형모 감독의 이후의 많은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여성의 어떤 원형을 보려면 이 영화를 마가렛/정애를 중심으로 좀 더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단 여성은 남쪽이나 북쪽이 지닌 각각의 공산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고정시켜 놓을 수 없는 매우 불안정한 존재로 재현된다. 이 점은 마가렛/정애가 운명의 손인 북한 공작원(주선태)의 총에 한 방 맞고 쓰러져서 결국 국군 소속인 신영철이 쏜 총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마가렛이 물론 한국영화에서 보이는 특이한 휴먼 타입에 속하지만 이 휴먼을 좀더 면밀하게 젠더적 관점에서 보면 여성은 어떤 국가 이데올로기의 자동기계가 되기에는 자신의 욕망에 지극히 충실한 개인 주체로 재현된다. 북한이 아무리 그녀를 마가렛이라고 호명하고 남한이 아무리 그녀를 정애라고 호명해도 그녀는 완벽하게 국가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지 않는 주체인 것이다. <운명의 손>은 이러한 고정되어 있지 않은 여성 주체를 죽음이라는 가학적인 서사를 동원해서 제거한다. 두 번의 죽음을 겪는 여성, 두 번의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통제되지 않는 그녀의 욕망은 무엇인가. 첫째는 미국과 구라파 등 서구의 상품과 문화에 대한 물신적 욕망이고, 둘째는 가부장제 아래에서의 전통적인 결혼이나 가족제도를 거부하고 자유연애나 불륜과 동성애 등으로 드러나는 여성의 성적인 욕망이 그것이다. 소비와 성에 충실한 자기애적 여성 정체성은 1950년대 포화가 가라앉은 반쪽의 땅에서 남한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여성에게 허용한 ''자유의지''이다. <운명의 손>에서 양공주/간첩이라는 마가렛/정애의 이중적 정체성은 물론 두 가지 욕망 모두를 체현한 인물이다. 한형모의 이후 여성영화에서 이 두 가지 여성의 욕망은 각기 다른 사회적 조건 속에서 반복 복제된다. 그러면서 여성은 전통을 거부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서구식 근대를 받아들이는 근대적 욕망의 주체가 된다. <운명의 손>에서 마가렛/정애는 노동자 대학생이라고 위장한 영철에게 양복을 입히고 댄스 홀을 데려가고 골프를 치며 권투시합 등 각종 여흥문화에 흠뻑 취해 있다. <돼지꿈>에서 아내(문정숙)는 밀수 의약품을 사기 위해 기르던 돼지를 팔고 월세금과 아들 영준(안성기)의 농구화 살 돈을 다 끌어 모아 가짜 미국 2세인 찰리 홍(허장강)에게 줬다가 사기를 당한다. 한편 <자유부인>에서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은 모두 서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선영(김정림)은 파리양장점에서 매니저 일을 하면서 서양식 춤을 배우고 바람을 피운다. 오선영의 친구인 윤주(노경희)는 밀수품을 사려다가 사기를 당한다. 한편 장교수와 데이트를 했던 타이피스트 미스 박은 미국인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사장>(1959)에서의 요안나(조미령)와 <청춘 쌍곡선>에서 이부남(양훈)의 동생인 미자 또한 ''자신의 생활 전부를 뜯어고쳐야 하는 서구식 문화에 물들어 있다. 결국 남한과 북한 이데올로기의 호명을 들어맞지 않는 불완전한 주체인 여성은 이제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고 서구화를 통한 근대를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여성으로 거듭난다.

한형모 감독의 여성영화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여성 주체를 여성을 중심으로 재현함과 동시에 이를 억압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적 근대와 새롭게 공적 영역이 탄생하면서 출현한 여성의 욕망을 ‘현모양처’라는 사적 영역으로 개조시키고 갱생시키는 과정, 그것이 한형모 감독의 여성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을 길들이고 억압하기엔 그 욕망을 탄생시킨 근대의 충격은 너무 컸다. 폐허의 땅에 핀 금단의 열매가 여성에게 얼마나 유혹적이며 달콤한지를 아마도 한형모 감독은 알고 있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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