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레일라 페로-레비, 2016

by.정지연(영화평론가) 2018-05-29조회 8,568

“물속에서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여요” 

사랑에 관한 가장 시적인 찬가 <라탈랑트>(장 비고, 1934)에서 이제 막 결혼식을 치른 젊은 아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이야기를 그저 조롱하며 비웃는다. 영화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는 <라탈랑트>의 바로 이 장면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세수를 하는 남편에게 물속에서 눈을 떠보라고 말하는 아내, 그런 아내를 놀리는 남편의 장면이 이어질 때 화면 안으로 또 다른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온다. <라탈랑트>를 연출하던 29살의 청년 장 비고였다. 

장 비고의 유일한 딸이었던 루스 비고는 <라탈랑트>의 현장 촬영분을 바라보며 여전히 젊은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애잔한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 비고의 여러 영화적 장면들에 대해 그녀는 애절한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 카메라가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현장에 있는 우리 아버지가 보일 텐데”
 
장 비고 감독
장 비고 감독

프랑스의 여성 감독 레일라 페로 레비의 다큐멘터리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는 우리에게 시적 리얼리즘으로 대변되는 장 비고와 그의 딸 루스 비고에 관한 영화이다. 1905년에 태어난 장 비고는 1934년, 고작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총 4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초현실주의와 아방가르드, 기존 예술가들이 영화라는 매체의 매혹과 실험으로 다양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던 그 시기, 장 비고는 보리스 카우프만이라는 예술적 동지(지가 베르토프의 동생. 장 비고 영화 전체를 촬영했으며, 이후에는 할리우드에서 오토 프레밍거 등과 작업했다.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 엘리아 카잔의 <워터 프론트>의 촬영 감독이다)를 만나 영화를 시작했다. 그의 영화들에는 국가와 체제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저항, 세상을 시적인 서정과 추상으로 사유할 수 있었던 예술가의 영감, 그리고 이십 대 청년의 맹목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매혹이 담겨 있었다.

니스라는 휴양도시에 관한 계급적이고 실험주의적 몽타주라 할 수 있는 <니스에 관하여>, 물에 대한 장 비고 특유의 매혹을 잘 드러내는 <수영왕 타리스>, 린제이 앤더슨과 고다르, 트뤼포의 오마주를 이끌어냈던 학생 반란에 관한 영화 <품행 제로>, 그리고 초현실주의와 계급적 현실을 넘나드는 사랑에 관한 찬가 <라탈랑트>까지. 장 비고의 영화적 필모그라피는 길지는 않았지만 강렬했다. 
 
'루스, 아빠, 엄마'
'루스, 아빠, 엄마'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는 바로 그 영화사의 전설이 된 장 비고를 아버지로 둔 루스 비고의 기억과 고백에 관한 영화이며 내밀한 가족사에 대한 진술이다. 루스 비고는 아버지를 세 살 때 잃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병약했던 엄마 역시 사망한다(장 비고와 그의 아내는 결핵에 시달렸고, 이들은 각자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머물렀던 요양원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어 외조부의 손에 맡겨지지만 그 역시 금방 사망한다. 루스 비고는 어린 나이에 기숙학교 등을 떠돌며 성장해야 했다. 부모를 잃을 당시 그녀는 너무 어렸으며,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거의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루스 비고는 아버지가 남긴 영화적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1931년생인 그녀는 이후 영화평론가로 성장했으며, 여러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도 활동하였다. ‘장 비고 상’ 수상위원회의 책임자이기도 한 그녀는 아버지로서의 장 비고와 영화사의 거장으로서의 장 비고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는 장 비고의 여러 영화적 주요 장면들과 루스 비고가 살고 있는 집 내부의 여러 사적인 공간과 흔적들을 정교하게 연결하고 교차 편집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루스의 집안은 흡사 수집가의 거대한 자료실처럼 빈 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영화인으로 80여 년을 살면서 쌓아온 삶의 흔적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보물처럼 자리하고 있는 장 비고에 관한 자료와 유품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루스 비고는 쌓아두었던 물건 중 가장 중요하게 간직했던 박스 하나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레일라 페로 레비의 카메라와 그녀의 아들 앞에서 처음으로 그 박스를 공개하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장 비고의 친필 시나리오를 비롯하여 각종 사진들, 여러 서한들, 비고의 영화에 실제로 쓰였던 영화적 소품들, 그리고 장 비고의 아버지였던 알머레이다에 관한 기록들. 

알머레이다 비고는 프랑스의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킨 유명한 아나키스트였으나 삼십 대 초반에 검거되어 바로 다음 날, 수감된 감옥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 사건은 어린 장 비고에게 정치적, 경제적 트라우마로 남았고, 훗날 청년 장 비고의 영화적 세계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년기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장 비고의 삶은 고스란히 루스 비고에게도 이어졌다. 

이 영화 속에서 루스 비고의 아들은 처음으로 알머레이다로부터 장 비고, 그리고 어머니로 이어지는 가족사의 내밀한 상처들을 직접 듣게 된다. 루스 비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녀가 프로그래머로 수십 년을 일 하면서도, 그녀는 장 비고에 대한 그 어떤 프로그램도 진행하지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 루스가 어떠한 성장기를 거쳤는지, 그녀에게 장 비고에 관한 자료가 어느 정도 남겨져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감히 물어볼 수 없었다. 박스를 공개한 후, 루스는 아들과 함께 장 비고의 영화들을 함께 보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영화감독 장 비고의 유산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루스 비고가 아버지의 흔적들을 아들에게 알려주는 과정에 가까우며, 이 영화에서 가장 애절한 순간이기도 하다. 

루스는 장 비고의 영화 장면들 속에 감추어진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모습들을 발견해낸다. <라탈랑트>의 카페 신에 손님으로 앉아있는 어머니의 얼굴, 혹은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버지라는 사실, 또 단역으로 등장하는 피에로가 다름 아닌 장 비고임을 그녀는 알아채고 아들에게 알려준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들 혹은 다른 캐릭터들에 의해 얼굴이 거의 가려진 존재가 어머니임을 그녀는 알아본다. 아들이 루스에게 “어떻게 알았나요? 누군가 말해 줬나요?”라고 질문하자, 그녀는 처연한 눈빛으로 응답한다. “내가 딸이니까 알 수 있지”. 그리고 이어지는 루스 비고의 탄식, “아, 카메라가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현장에 있는 우리 아버지가 보일 텐데”. 그녀는 장 비고의 영화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품행제로

이 영화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는 공적인 역사가 되어버린 영화사의 거장 장 비고와 그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딸 루스 비고의 사적인 애정과 기억에 관한 기록이다. 절묘하게 편집된 장 비고의 영화 속 장면들과 루스 비고의 현재의 모습들. 알머레이다로부터 장 비고, 그리고 루스와 그녀의 아들로 이어지는 가족의 긴 역사와 상처, 그리고 남겨진 유산들에 대해 이 작품은 매우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담아 묘사하고, 오마주를 바친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이어지는 <품행제로>의 기숙사 반란신. 여전히 유효한 장 비고의 시대정신과 영화가 묘사할 수 있는 매혹과 열정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ps. 이 영화 촬영이 끝나고 얼마 후(2017년 2월), 루스 비고가 사망한다. 루스의 집안을 정리하던 아들은 비단 루스가 그에게 공개한 상자만이 아니라 집안 곳곳에 엄청나게 많은 자료들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 자료들은 현재 시네마테크 혹은 다른 영화자료실 등으로 어떻게 기증할 것인지를 논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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