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린 비>(이장호, 1974)에서 영화를 꿈꾸기 시작하다

by.변영주(영화감독) 2008-05-04조회 1,676

내게 한국영화의 진 맛을 알게 해준 영화는 바로 이장호 감독님의 <어제 내린 비>였다.  누군가 나에게 절망하는 청춘의 비통함을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을 들라고 한다면 두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하나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오는 <젊은이의 양지>이고 다른 한편이 바로 <어제 내린 비>에서 영후(김희라)가 영욱(이영호)과 민정(안인숙)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출생의 비천함을 폭발하는 장면이다. <어제 내린 비>를 본 후, 이장호 감독님의 모든 영화를 보려고 애썼고, 하얀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모든 이십대의 남성들을 동경했다.

<어제 내린 비>는 80년대 한국영화의 중심인 이장호 감독님의 대표적인 청춘영화라는 면에서, 또한 당대의 청년 아이콘인 트윈폴리오 출신의 윤형주의 제목과 같은 주제가 역시 유명한 점에서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위 오빠가 여덟살 위인 나름 늦둥이로 자라서인지 나에겐 내가 20대였던 80년대의 들국화라는 음악적 아이콘보다 70년대의 아이콘인 송창식과 윤형주의 음악들이 훨씬 서글픈 청춘의 송가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들의 음악과 더불어 이장호 감독님의 영화는 나로 하여금 그리 관심이 없었던 우리 오빠 세대(70년대 말의 청춘들)에 대한 관심을 증폭 시켰고, 난 그들의 절망을 영화를 통해 청춘이라고 배우게 되었다. (학교에서 수없이 청춘예찬 운운하며 국어시간에 가르쳤던 그 이해 못할 단어를 영화에서 순식간에 배운 것이다.) 하길종 감독님의 바보들의 행진에서 칠판에 절망을 기록하는 병태의 강의실 장면은 바람불어 좋은날에서 춘식(이영호), 덕배(안성기), 길남(김성찬)의 연애담과 함께 고등학생을 시작하던 나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지금도 최고의 연기를 보이고 있는 안성기씨와 돌아가신 김성찬씨는 김희라씨와 함께 이장호 감독님의 영화에서 가장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청춘에 대한 관심은 점차로 배우에 대한 관심으로 한 감독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변화해 가는데, 나에겐 그 원점이 <어제 내린 비>였던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 제일 행복한 것은 이제 마음 놓고 극장을 갈 수 있다는 거였다. 대학 입학식을 배창호 감독님의 <깊고 푸른 밤>과 함께 했던 그 때. 나에게 언제나 영화에 대한 갈망을 부추켰던 두 명의 감독님이 있었는데 임권택, 배창호 감독님이었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처음 만난 것은 물론 동시상영 극장에서 <만다라>였지만, 어린 시절인지라 그 깊은 의미는 생각지 못한 채, 그저 우리나라에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있구나(만경평야) 정도만을 느꼈지만, <길소뜸>에서 <연산일기>까지 감독님의 80년대 중반이후의 대표작들은 흡사 내가 한국의 현대사의 질곡을 책이 아니라 ‘그분의 영화를 통해 배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이다. KBS에서 시작된 이산가족 찾기로 온 나라가 눈물에 싸여 있을 때, 문학에서는 박완서 선생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로, 영화에선 임권택 감독님이 <길소뜸>을 통해 눈물 이상의 의미, 현대와 가족, 그리고 역사라는 의미를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티켓>과 <씨받이>를 통해 내 스스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리고 <연산일기>를 보며 처음으로 연기를 하는 배우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새삼 느꼈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가 세상을 읽는 최고의 기쁨이었다면 배창호 감독님의 영화는 영화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해준 영화들이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시장의 아버지를 찾는 아들의 롱테이크 시점 핸드헬드 숏트는 지금도 기억나는 명장면이고, <황진이>의 쇼트들은 하나 하나가 흡사 민화와 모네의 그림을 섞은 듯 아름다웠다. <안녕하세요 하느님>을 본 후, 경주는 나에게 마음이 흔들릴 때면 찾게 되는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이렇게 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한국영화는 결국 나를 부족한 게 많지만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영화감독으로 만들었다. 다만, 한국영화를 생각함에 있어 마음 아픈 현실이 하나 있다. 그러니까 꽤 오랜 전. 영상자료원의 부탁으로 한국영화 1세대에 관한 다큐멘타리 제작을 함께 한 경험이 있다. 임권택 감독님의 80년대의 명작들의 시나리오를 쓰셨던 송길한 작가님과 함께 작업하는 영광과 기쁨을 느꼈지만, 문제는 내가 책임을 진 1세대 감독님의 작품을 한편 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그때를 기억하면 결국 나를 성장시키고 꿈꾸게 한 한국영화를 나의 후배들이 공유할 수 있기 위해선 정말 많은 일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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