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구타유발자들 원신연, 2006

by.김봉석(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 2016-09-26조회 18,223
구타유발자들 스틸

<구타유발자들>이란 제목을 다시 생각해본다. 구타를 유발하는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뮤지컬 오디션을 본 인정(차예련)은 교수 영선(이병준)의 차에 타고 한적한 강변에 내리게 된다. 목적이 뻔한 교수에게서 도망친 인정은 순박한 얼굴을 한 봉연(이문식)의 오토바이에 타게 된다. 그런데 봉연은 동네 양아치들의 두목이었다. 양아치들은 고등학생인 현재(김시후)를 목만 남기고 땅에 파묻는 등 학대를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현재는 고등학교 시절 봉연을 괴롭히던 문재(한석규)의 동생이다. 봉연은 경찰이 된 문재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그들의 폭력은 서로 얽혀 있다. 과거의 폭력이 현재의 폭력을 유발하고, 지금 권력을 쥔 쪽이 약한 자를 끝없이 괴롭힌다.

원신연의 두번째 장편 <구타유발자들>은 지금 봐도 불편하다. 그들의 폭력에는 도대체 이유가 없으면서도 너무나 당연하다. 괴롭히고 싶으니까, 내가 힘이 있으니까. 현재를 괴롭히는 이유가 정말 그의 형 때문인 것일까? 봉연의 부하들은 과연 그런 과거를 알고 있을까? 그냥 괴롭힐 대상이 있으니까 폭력을 휘두른다. 그게 즐거우니까. 폭력이 그들의 놀이이니까. 마찬가지다. 교수가 인정을 강간하려 한 것은 그녀가 약자이기 때문이다. 가지고 놀아도 된다고 판단한 아랫사람이니까. 누가 강하고 약한지 잘 알고 있는 교수는 시골 양아치들을 만나는 순간 고개를 숙인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육체적인 권력만이 존재할 뿐이고, 그는 도시에서 온 중년 남자일 뿐이니까.

시골에 대해 환상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시골은 조용하고, 평화롭고, 인정이 남아 있는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그런 인식을 부정하는 영화들은 차고도 넘친다. <안개마을>은 폐쇄적인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야만과 폭력을 그린다. <김복남 살인사건>은 마을 전체가 폭력을 용인하고 시스템의 일부로 이용하는 실태를 보여준다. 샘 페킨파의 <어둠의 표적>과 존 부어맨의 <딜리버런스>를 보면 시골이 오히려 더 끔찍한 폭력의 도가니다. <브레이크 다운>에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시골의 농부들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다. 살아가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은, 자연에게 잘못 배운 생존법이다.

도시에서 온 중산층 남자들은 시골 사람들의 폭력에 당하다가 마침내 저항하면서 광기를 드러낸다. 그들에 맞서 폭력을 휘두르고 잔인하게 죽여버린다. 그것은 단지 광기일까? 어쩌면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의 유전자가 아닐까?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킨 크로마뇽인의 후손인 인간은 살인의 역사를 거듭해왔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성이라는 발명품으로 덮어씌웠지만 우리의 본성은 결국 폭력일지도 모른다. 시골은 포장이 허술하기에 인간의 본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아닐까? 일라이 로스의 <그린 인페르노>가 보여주듯, 식인종은 아주 순진하고 평온하다. 다른 사람들을 사냥하고 죽이고 먹는 것을 뺀다면.

원신연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구타유발자들>을 구상하게 된 경위를 말했다. 단편 촬영 로케를 위해 인적이 드문 산속을 헤매고 다녔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깊은 숲속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청년들과 만났다. 보는 순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함께 먹자고 권했다. 다 구워지지도 않은 빨간 고기를 쌈 싸서 먹으라고 건네주는 것을 다 받아먹었다.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거절한다면, 그들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죽이고 내버리면 시체조차 찾지 못할 것 같은 깊은 산속이었다. 그 경험이 <구타유발자들>로 확장되었다. 시골에서 만난 양아치들. 그들의 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외부의 이방인들에게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온다. 영선에게 강간을 당할 뻔했던 인정은 시골 양아치들이 하는 짓을 보면서 그들과 같이 있는 것보다는 다시 영선의 차를 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문명의 혜택을 한껏 누리고 사는 도시인이 보기에 시골 양아치들은 너무나도 위험해 보인다. 

 <구타유발자들>은 무척이나 불친절하고 불편하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인정이 교수를 따라 드라이브를 나선 이유는 오디션에 힘을 써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권력에 타협한 것 역시 죄다. 폭력의 희생자였던 현재는 자신이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동일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폭력의 연쇄사슬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그 순간 그들은 결국 구타를 유발하는 존재가 된다. 스스로 폭력의 자장 안에 기꺼이 들어갔으니까.

 <구타유발자들>은 폭력으로 시작하여 폭력으로 끝난다. 육체적인 폭력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눈을 괴롭힌다. 어쩔 수가 없다. 폭력으로 망가져버린 봉연은 다시 폭력을 행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당한 만큼 어딘가에 풀어내야 한다. 과거를 용서하고 새로운 문명인으로 살아가기에 그는 한없이 부족하다. 그는 도시가 아닌 시골 마을의 치졸한 양아치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패자이고,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악인은 권력을 가진 경찰이 되었다. 두들겨 맞고 비명을 지르며 세월을 보내는 동안 악인들은 권력을 찾아 도시로 가거나 마을의 강자가 되었다. <구타유발자들>은 닫힌 공간 안에 그들만이 아니라 관객까지 모두 몰아넣고 끝없이 폭력을 보여준다. 답답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한참이 지나고도 기억이 난다. 봉연의 순박한 얼굴이 악마로 변하는 순간과 문재의 야비한 웃음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저 멀리 시골 어딘가에 그런 악인들이 있다고 <구타유발자들>은 말하지만, 정작 폭력의 발원지는 도시 아니 문명 자체에 도사리고 있으니까. 목만 남기고 우리를 땅에 묻어버리지는 않지만 이미 우리는 폭력의 연쇄사슬 안에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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