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올드보이 박찬욱, 2003

by.이상용(영화평론가) 2017-09-22조회 8,982
올드보이 스틸이미지, 장도리를 들고있는 최민식

* 이 글에는 <올드보이>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는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인 동시에 세계영화사의 주요한 이정표로 언급되고는 한다. 토론토영화제가 선정한 대표적 영화 목록에는 2003년도의 영화로 <올드보이>를 꼽고 있다. 그런데, 영화에 대한 작품 분석이나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을 중심으로 다룬 작가론은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정작 이 영화가 던진 이정표에 대해서 언급된 적은 없다. 칸영화제의 수상작이라는 사실 정도를 다루는 데 그치면서 <올드보이>가 이정표로서 어떤 지도를 내놓았는지에 대한 비평적 접근은 드물었다. ‘박찬욱’ 감독의 이름으로 용산의 한 극장이 개관하게 되었을 때 통로에 전시된 사진과 필모그라피를 바라보면서 박찬욱 혹은 박찬욱의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유명세 덕분에 망각된 질문이자 예술의 본성을 향한 “누구냐 너?”에 해당될 것이다.

<올드보이>는 오대수(최민식)가 15년간 감금되는 상황으로 시작된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후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면서 복수를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인물인 이우진(유지태)은 자신이 오대수를 가둔 이유를 5일 안에 밝혀내면 스스로가 죽어주겠다는 이상한 제안을 한다. 그의 약속은 비밀을 감추기 위한 약속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드러내기 위한 약속이다. 이 과정을 통해 사건(시간)의 전모가 드러나고, 관객들은 깨닫는다. 진정한 복수의 화신은 방안에 갇혔던 오대수가 아니라 이유를 감췄던 이우진이라는 것을. 그의 삶은 과거 고등학교 시절에 붙들려 있고, 성인으로 자라나지 못하는 신체적 고통까지 받았다. 나이는 들었지만 몸은 소년인 시간의 감옥에 갇힌 이우진이야말로 영화의 제목 그대로 ‘올드보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영화를 보고 나면 관객들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오대수다. 복수의 화신 이우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미노타우르스처럼 시간의 미로에 숨겨져 있다. 이 작품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복수를 하는 자가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복수를 도모하는 쿵후 영화나 서부극에서는 복수하는 자가 주인공이기 마련이다.) 복수를 당하는 자가 주인공처럼 여겨지고, 이를 위해 영화의 중반까지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뒤엉키며 전개된다. 복수를 하는 자와 당하는 자, 둘 중 누가 더 악마인지 경계가 흐릿해진다. 오대수는 자신도 모른 채 가해자였고, 당연히 그 사실을 망각해 버린 채 살아왔고, 어느새 피해자의 분노로 망치를 들고 액션을 펼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하는 것은 망각한 오대수가 아니라 기억하는 이우진이다. 
최민식
오대수

유지태
이우진

강혜정
미도

가해자와 피해자, 망각과 기억이 전도되는 방식은 <올드보이>의 핵심이다. 세상으로 나온 오대수가 찾아간 횟집에서 생낙지를 먹다가 힘없이 쓰러지는 장면이나(그는 본능적으로 살아있는 것을 찾으면서도 낙지를 먹은 후 죽은 자처럼 쓰러져 버린다), 횟집에서 만난 ‘미도’와 정사를 벌이고, 그녀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후반부의 장면의 충격은 선과 악의 경계를 알 수 없는 혼돈의 충격이다. <올드보이>는 다가올 시간을 향해 ‘행복의 조건’을 약속하는 대중 예술의 방식들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영화다. 미래가 다가올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인물들의 죽음과 극도로 치닫는 아드레날린의 상승하는 수치다. 흡사 법정의 최후 진술처럼 “제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지만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닙니까?”라는 인간적 호소를 담은 대사는 모든 것이 전도되어 버린 세계에서 그나마 인간적 감정에 호소하려는 일종의 제동장치처럼 보인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더한 고통을 배가시키는 영화의 형식은 온전한 집이 불에 타오를 때 비로소 건물의 구조를 목격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보여주는 것이다. 뼈만 남은 채 타올라 버린 재투성이의 세상과 인간들을 보여주면서 세상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것이야말로 <올드보이>의 새로움이고, 모더니즘이 창궐한 20세기를 지나서도 여전히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된다. 관객들은 파멸의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보며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질문하면서도 끝내 이 인간존재의 심연에 절망하거나 매혹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심연 그 자체로만 던져졌다면 영화가 수용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올드보이>는 몇 가지 배려가 있다. 피투성이로 날뛰는 오대수의 괴물적 행동 뒤에는 ‘최면술’이라는 장치가 있다. 이것 덕분에 오대수의 행동이 대부분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외부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 통제당한 것임을 항변하게 만든다. 그는 괴물이지만 어쩔 수 없이 괴물이 된 존재이다. 이전에 선보인 <복수는 나의 것>(2002)은 신성한 공포의 파괴력을 가장 멀리까지 던진 박찬욱 감독의 영화임이자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야심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권리를 주장하는 연민 어린 대사나 무의식을 통제하는 최면술이 없었기에 관객들의 호감을 쉽게 끌어내지 못했다. <올드보이>는 이러한 지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방법론이 튀어나온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터뷰를 통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듯이 상투적인 것을 경계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연민이나 동정심은 자주 버려지고 지나쳐 버린다. 연민이나 감정의 상투성을 대신하여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계속 등장하는 것은 상투성의 풍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페티시적인 요소들이다. 인터뷰나 지면을 통해 상투적인 것, 관습적인 것, 클리세를 지나치게 싫어한다고 강조해 왔는데, 그렇다고 활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관습을 극단적으로 비틀어 보인다. <올드보이>의 만두에 대한 집착처럼 특정 사물과 감각에 대한 물신화를 통해, 가장 상투적인 것의 가져와 극단적인 상황으로 폭파시킨다. ‘만두’의 기억을 찾아 복수를 시작하게 되는 출발은 일반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상상력의 전개일 것이다. 최근에 선보인 <아가씨>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인물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아가씨가 낭송한 책의 한 페이지를(이보다 더한 페티시는 없을 것이다)을 고스란히 가져와 두 인물은 그 장면을 재현하면서도(페티시) 비틀어 버린다.(패러디) 이러한 흐름 속의 놓인 대표작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이다. 

한 편의 영화가 오롯이 기억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박찬욱 감독이 강조하는 것은 통합되지 않는 세계의 파편들이다. 여기에는 순응하는 페티시가 있고, 동시에 순응하는 것을 거부하는 패러디가 있다. 현실과 꿈, 삶과 죽음, 섹스와 살인의 파편들이 뒤엉켜 매혹적이면서(패티시), 공포스러운 세계의 모습(패러디)을 한 화면에 담아낸다. 

그 출발점이 <올드보이>였다. 박찬욱의 영화에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복수라는 주제나 특정한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은 점점 더 증발시키면서 이를 대체할 방법론적이고 형식적 새로움의 시도 속에 영화의 목록을 채워간다. 그것은 기존의 한국영화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임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부르주아 특유의 젠 체가 있다며 비판할 것이고, 누군가는 감각적 영상들의 빽빽함에 답답하겠지만 돌이켜보면 한국영화의 계보 안에서 지성과 매혹의 극단으로 채워갔던 사례는 없었다. <올드보이> 이후 박찬욱 감독은 자신만의 계보를 채우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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