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소름 윤종찬, 2001

by.금승훈(프리랜서 평론가) 2017-12-06조회 5,480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사건′의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지 타자. 즉, ′사건′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람들에게 그 기억이 공유되지 않으면 ′사건′은 없던 일로 되어버리고 만다. (…) ′사건′의 기억이 타자에게 공유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기억 서사』 중에서, 오카 마리 - 

1990년대 이후 한국 공포 영화의 출발은 1998년 개봉한 <여고괴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개봉 당시 전국 200만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의 흥행으로 충무로에도 본격적인 ‘젊은’ 공포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자귀모>(1999) <>(1999)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해변으로 가다>(2000) <찍히면 죽는다>(2000) <가위>(2000) <세이 예스>(2001) 등의 공포 영화들은 19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제작된 공포 영화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공포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러도 좋을 이 시기를 지나 2003년에는 <장화, 홍련>이 역대 공포 영화 중 최고 흥행을 기록하고,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에 공포영화 <아카시아>가 선정되면서 그 부흥기는 정점을 찍었다. 그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그 흐름은 다소 주춤해졌지만 여전히 관객의 사랑을 받는 공포 영화들은 종종 제작되어 <알포인트>(2004) <기담>(2007) <고死: 피의 중간고사>(2008) 등의 작품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런 한국 공포 영화의 계보에서 이상하게 대중에게 잊힌 작품이 있다. 바로 윤종찬 감독이 2001년에 만든 <소름>이다.

<소름>이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비단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소름>으로 데뷔한 윤종찬 감독은 이후에도 (공포 영화와는 전혀 관련 없는) <청연>(2005)과 <나는 행복합니다>(2008) <파파로티>(2012) 등의 영화를 만들어서 커리어를 이어온 대중 영화감독이며, <소름>의 주인공을 맡은 두 배우. 장진영김명민은 누구나 다 아는 배우들임에 틀림없다. 거기다 이 영화는 2014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한국 영화 100선에도 선정이 되었는데, 신기한 것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이 영화로 영화 데뷔를 한 배우 김명민이나 혹은 어떤 평론가도 이 영화가 마치 사라진 것처럼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2001년에 만들어졌고 그런 의미에서 대중과 평단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소름>을 다시 본 후에 나는 이 영화가 잊힌 것이 이 영화의 불길한 느낌과 교묘하게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이 영화는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들에게 회자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묘하게 이 영화가 공포를 그려내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소름>이 취하고 있는 공포의 방식은 피가 난무하는 슬래셔 방식이거나 관객의 트라우마를 자극 시키는 심리적 방식이거나 혹은 한국 영화에서 흔히 취하는 혼귀의 방식이 아니라 기억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용현(김명민)이 504호에 이사를 오면서 시작되는데, 그 504호는 전 입주자인 광태가 불타 죽은 곳이다. 그런데 광태는 마치 용현과 선영(장진영)의 과거 사연을 알기라도 하듯, 미금아파트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었고 그 소설을 완성하기 전에 죽어 용현이 그 집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광태가 그 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왜 그 자리에 용현이 찾아오게 됐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소설이라는 가상의 허구를 완성하기 위해 그 이야기의 실체적 기억이 들어온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가상의 허구와 실체적 기억 사이를 맴돈다. 영화에 세 번 등장하는 롱테이크는 그런 허구와 기억 사이를 더욱 몽롱하게 만드는 뛰어난 장치이다. 재밌는 것은, 이 롱테이크 장면이 나올 때 주인공들은 본인의 기억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기억은 허구 같은 느낌이고, 불길하고 누설하면 안 되는 금기와도 같은 것이다. 

용현과 선영의 기억은 차이가 있다. 용현은 자신의 기억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용현은 차라리 기억을 덮어버리면서 그 기억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용현은 동급생을 죽인 후 산에 파묻었고, 선영이 죽인 선영의 남편을 본인 손으로 매장하고 선영을 죽인 후 선영마저 산에다가 매장한다.(그리고 직접적으로 묘사는 안 됐지만 형사들이 용현과 전에 만난 여자의 행방을 찾는 것이나, 용현의 이야기를 미뤄보았을 때 용현의 전 애인도 매장하여 실종된 것으로 보인다.) 용현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기억은 본인이 고아라는 사실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용현이 가지고 있는 원(原)기억은 자신이 고아라는 것이다. 반면 선영은 그 기억을 용현처럼 묻지 못하고 잊지 못해 고통받는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것도, 아버지가 도망간 것도 기억하며 자신이 아들을 잃어버렸다는(죽였다는) 것도 기억하며, 남편을 죽인 것도 모두 기억한다. 그래서 선영이 죽고 나서도 그녀의 기억이 플래시백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죽어서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묻히는 것은 본인 자신이다.

영화의 전환점은 바로 용현이 그 기억을 다시 떠올렸을 때다. 글의 처음에 언급한 오카 마리의 글처럼 용현은 사건의 기억을 외부와 함께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억은 없던 사건이 되었지만 선영이라는 타자에게 자신의 기억을 하나 둘 씩 공유하게 되자 그의 비밀은 이 작가(그리고 504호에서 불타 죽은 광태)에 의해 소설의 형태로 완성된다. 미금아파트를 둘러싼 용현과 선영의 비밀을 어떻게든 이야기를 하려고 한 사람은 죽거나 미쳐버린다. 영화는 기억을 잊지 못해 고통받는 선영의 기억과 기억을 묻어버리는 용현의 기억 중에서 용현의 기억. 다시 말해 소설의 발간이 실패하고, 용현이 선영을 죽이는 방법을 택한다. 영화가 용현의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은 이 영화에서 밝혀지는 기억의 실체가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길하고 끔찍한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미금아파트라는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미금아파트의 불빛이 깜빡거리는 모습을 찍은 롱 샷을 마지막 쇼트로 장식한다. 용현은 그 기억을 묻어두려고 했지만 미금아파트라는 공간은 이 기억을 덮지 못한 것이다. 곧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폐가처럼 보이는 이 공간은 살아 있지만 죽은 공간이고, 기억을 머금고 있지만 곧 사라지는 공간이다. 이 영화가 불길하고 음침하며 떠올리고 싶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그 끔찍한 기억을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영화 스스로가 잔존하게 만드는 결론으로 완성했을 때 그것은 이 저주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영화 스스로 되새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소름>은 그 저주를 덮어버리지 않고 다시 되새기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비극적 진실의 공포를 직면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잊고 싶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그 끔찍한 기억은 결국 잊을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결론에 다다르게 만든다. 어쩌면 이 이유가 이 영화를 누구도 다시금 기억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일까?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소름>은 한국 영화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저주받은’ 걸작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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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북아현동의 금화아파트는 2015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물리적 공간은 실제로도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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