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사 나운규의 28주기 추모작품
신상옥 감독의 <
벙어리 삼룡(1964)>은 “춘사 나운규의 28주기 추모작품”이라고 홍보되었다. <
오몽녀>를 유작으로 남기고 1937년에 영면한 나운규는 1929년에 <
벙어리 삼룡>을 감독하고 또 그 자신 삼룡 역을 맡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리뷰에서는 한결같이 마지막의 화재 장면에 1,000여명의 비(非)전문배우(엑스트라)가 동원되어 공들여 촬영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출세작 <
아리랑(나운규, 1926)>에서부터 광인, 부랑아, 떠돌이 등 방외인 연기로 자신의 페르소나를 구축한 배우 나운규에게는 계급적 원한에 사로잡힌 벙어리 캐릭터가 꼭 맞는 옷처럼 어울렸을 것이고, 역시 <아리랑>에서부터 수백, 수천명 농민이 등장하는 몹씬 촬영을 시도했던 감독 나운규에게는 원작에 나오는 화재 장면이 탐나는 스펙터클이었을 것이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 프린트가 유실되어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이 얼마나 그에 대한 오마쥬를 표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일단 위의 화재 장면에서 신상옥이 공을 들인 것은 수많은 엑스트라 촬영이 아니라 순덕아씨에 대한 삼룡의 ‘헌신’이었던 걸로 보인다. 나도향의 원작소설(1925)에는 불타는 집에 뛰어든 삼룡이 제일 먼저 오생원을 구해내고 다음으로는 자기 몸이 불에 상하는 것도 잊은 채 순덕아씨를 구하면서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즐거운 쾌감,”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씨를 구해냈다는 사실에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띄우면서 죽어가는 삼룡의 사랑과 헌신이 클라이막스가 되는 셈이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이 원작의 결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반면, 신상옥의 작품에서는 삼룡의 손에 구출된 순덕아씨가 삼룡에게 ‘서방님(광식)’도 구해달라고 청하자 삼룡이 마지못해 다시 불속에 뛰어들어 광식을 구해내다가 둘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그 마지막 순간 과연 삼룡이 “평화롭고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피터팬 콤플렉스
왜 원작이나 나운규의 버전과 달리 신상옥의 작품에서는 삼룡이 광식과 같이 불속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설정되었을까. 영화에서 내내 순덕아씨와 삼룡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처럼 그려지기 때문에, 마지막에 삼룡에게 남편도 구해달라며 간청하던 순덕아씨는 결국 화마(火魔)에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잃은 셈이 된다. 원작에서 삼룡은 살려달라는 광식을 불구덩이에 남겨두고 순덕아씨만을 구한 후 숨을 거두기 때문에 삼룡과 광식 둘 다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신상옥 버전에서는 순덕아씨의 청 ‘때문에’ 삼룡이 광식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순덕아씨는 아들을 남편이 있는 사지로 몰아넣은 여자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루나무 강가를 거닐며 삼룡이 어리광부리던 모습을 회고하는 순덕아씨의 모습은 자신을 성가시게 하던 남성 가족들을 다 ‘처리’하고 홀가분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던 봉건주의자 남편과 성장을 멈춘(삼룡의 장애는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피터팬 콤플렉스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들 없이 이제 홀로 서게 된 몰락양반 가문의 딸.
당시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였던 정병욱은 이 영화에서 삼룡과 순덕아씨를 학대하는 광식의 행태가 “지나치게 지루하고 참혹”하다며 이를 “악의 과장된 표현”이라 비판한 바 있다.
박노식이 연기한 광식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삼룡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것은 물론, 양반의 예법을 운운하는 순덕아씨를 고까와하며 결혼 첫날부터 폭행한다. 정병욱은 “삼룡을 뭇매질을 하고 쇠스랑으로 마구 찍어대고 새댁을 걷어차고 할 적마다 곁 좌석에서 혀를 차고 비명을 올리고 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며 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전통에 어긋나는 표현이나 수법”을 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1)
삼룡의 지고지순함과 대비시키기 위해 광식의 악함을 부각시키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장인인 신상옥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광식의 폭력성은 삼룡처럼 피터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성장을 거부하는 아들이 지니는 철없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작에는 없던 식모 범실(
도금봉 분)의 “품에서 사내가 됐”던 광식이 그녀와 맺는 육체적 관계는 삼룡이 순덕아씨와 맺는 지순한 관계와는 얼핏 대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커플의 투샷이 모두 모자(母子)처럼 그려진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향토색짙은 문예작품2)
물론 이런 현재적 해석과 무관하게, 당시 언론과 평단의 관심은 <벙어리 삼룡>이 1964년의 “최우수 영화,” “예술성을 살린 작품”으로서 아시아영화제, 샌프란시스코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등에서 본선에 진출하거나 수상을 했다는 점, 국적불명의 “청춘영화”가 판치는 국내 극장계에서 관객 21만명을 모아 흥행에도 성공했다는 점에 쏠려 있었다. 비록 “테마와 감각에서는 낡았”지만 “스타일면에서는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3), 무엇보다 벙어리 삼룡 역을 평소 반듯한 지식인 캐릭터에 어울리던
김진규가 맡았다는 점이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가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과 더불어 남우주연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1) 정병욱, “영화수상: 학대 속에 피어난 인간미,” <동아일보> 1964.12.17.
2) 진(振)의 <벙어리 삼룡> 리뷰(경향신문 1964.11.16.) 제목.
3) R, “베니스 영화제에서 장려상을 탄 <벙어리 삼룡>,” <영화예술> 196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