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감독의 영화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난처해질 때가 있다. 일단 필모그래피를 따라 자연스럽게 어떠한 '경향성'이 드러나면 (혹은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거꾸로 그 일관성으로 포획되지 못하는 작품들은 슬며시 접어두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감독이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 라면 '아웃라이어'처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작품을 만나는 순간, 호기심보다는 '어쩌자고...' 라는 나도 모르는 탄식이 앞서고 만다. 이러한 맥락에서 굳이 따지자면
이만희 감독의 1974년 작 <
청녀>는 분명 그의 이름을 돋을 새김해줄 작품은 아니다. 그렇다고 ‘숨겨진 걸작’이라거나 ‘재발견해야 하는 이만희의 작품 세계’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빈틈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청녀>라는 제목만 듣는다면 ‘이만희’라는 이름보다는 비슷한 시기에 <
화녀>, <
충녀> 등의 영화를 연출한 ‘
김기영’ 감독의 이름이 먼저 떠오른다. 만약 당신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채 이 글을 먼저 읽고 있다면, 그냥 그러한 혼란 속에서, 이만희라는 이름의 무게를 잠시 내려 놓고 머릿속에 연상되는 ‘-녀’ 시리즈의 영화들을 자유롭게 연상하면서 <청녀>를 보기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 교향곡’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섬마을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목사 형준(
남궁원)이 인근 외딴 섬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 석화(
서한나)를 데려다 키우면서 시작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혼자 남겨진 석화를 측은지심에 데려와 비슷한 또래의 자기 자식들과 함께 키우지만, 어느 순간 형준은 자신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고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해가는 석화를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괴로워한다. 상황은 형준의 아들 제구(
김경수) 역시 석화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자신의 종교적 믿음과 사랑, 그리고 지켜야 할 가족 사이에서 형준은 고뇌하고, 그런 형준을 보면서 제구는 아버지에 대한 경멸과 기독교적 믿음에 대한 회의에 고통스러워한다.
부자(父子)가 얽힌 삼각관계는 썩 편한 소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만으로 시선을 끌 만한 이야기는 아니기에 이 영화가 만약 여기에서 멈추었다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작품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한 지 1시간 20분 여가 흘렀을 때, 그러니까 전체 상영 시간 99분 중 약 4/5가 지나고 난 다음, 석화가 ‘개안(開顔) 수술’을 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이 때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전까지 형준의 시선에서, 형준의 목소리로 (목사인 형준이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방식, 그러니까 ‘기도’라는 형식을 경유하여 영화가 계속해서 형준의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을 사용했다는 상기해야 한다.) 진행되던 이야기가 석화가 눈을 떠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면서 서사의 주도권이 형준으로부터 (동시에 제구로부터) 석화로 넘어간다는 점이다. 그런데 수술을 하면서 시력을 회복한 석화가 맨 처음 본 대상이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형준도, 머릿속으로만 그려봤던 제구의 모습도 아닌 도심의 복잡한 도로, 잘 정돈된 도시 공원의 풍경, 쇼윈도 안에 전시된 보석들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시력(視力), 다시 말해 볼 수 있는 ‘능력’이 거세된 채, ‘그저 힘 없는’ 두 남자의 욕망의 대상일 뿐이었던 석화는 개안수술을 통해 잃었던 능력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때 그 욕망의 대상이 자신을 욕망했던 형준이나 제구가 아니라 자본주의 하의 물질적 세계라는 사실은 이 글의 맨 처음에서 우리가 떠올렸던 ‘-녀’ 시리즈의 많은 작품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만든다. ‘길들여지지 못했던 (혹은 미처 길들여지지 않았던)’ 이들 영화 속 여성 주인공들은 도시화, 산업화, 문명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이를 자신의 힘으로 이용한다. 이로 인해 그 과정에서 그녀들을 길들이려 했던 남성들은 망가지거나 부서진다. 그런데 이 동일한 상황이 <청녀>에서도 반복된다는 점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석화가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 힘을 회복하면서 그녀를 욕망하던 형준과 제구는 각자의 방식으로 욕망의 끝에서 부서진다. 형준은 늙고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고, 제구는 (남성성을 포기하고) 천주교 신부로서의 삶을 택한다. 한편 그렇게 모두에게 파국을 가져온 석화는 마지막 순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야생의 외딴 섬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서늘한 결말이 필연적으로 끌고 나올 여성의 욕망이나 이에 뒤따른 처벌, 좌절된 남성성 등의 논의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대신 자유로운 연상 과정을 조금 더 허락한다면 <청녀>를 보는 내내 (명확한 이유는 끝내 짚어내지 못했지만) 떠올랐던 김기영 감독의 <
이어도> (1977)를 함께 보아주길 바란다. 어쩌면 <
휴일> (1968), <
쇠사슬을 끊어라> (1971) 등의 영화와 <
삼포 가는 길> (1975) 사이에 <청녀>를 놓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이야깃거리를 발견할 수 있을 지 모른다. 마치 나만의 별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