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간적 얼굴
영화의 기본 설정은 전형적이다. 홀로 짐가방을 손에 쥔 채 서울역에 막 도착한 여성을 보여주는 오프닝은 시골 여성의 도시 수난기를 시작하려는 것 같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짐작보다 노동에, 노동보다 노동 사이로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 영화임을 알게 된다.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탑승한 세 명의 여성 주인공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버스 안내원 일을 관두는 결말을 맞는다. 영화의 주제가 노동의 불가능성 혹은 불가능한 상태로 지속된 노동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영옥이 연기한 영옥은 팍팍한 노동 현장에서도 유희를 소유한 드문 인물이다. 그녀는 터무니없이 적은 월급에 대한 저항으로 당당히 ‘삥땅’을 실행한다. 몸수색을 담당하는 직원과의 커넥션도 이미 형성한 터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쟁취하고 종국에 택시 운전사가 되어 탈주하는 진취적인 캐릭터다.
금보라가 연기한 성애는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노동 시장에 뛰어든 여성이다. 버스에서 만난 또래 남학생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으나, 계급 격차를 실감하며 사랑에 실패한다. 그녀는 정신적인 상처를 이기지 못한 채 노동 시장에서 퇴장한다.
유지인이 연기한 문희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순결한 도덕군자다. 문희는 일하는 꿈을 꾸는 동료들을 어루만지고, 삥땅 없이 있는 힘껏 일한다. 문희의 고결함은 거꾸로 노동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루트를 돌고 복귀했을 때 다음 운행까지 쉬는 시간은 단 17분. 17분 동안 입금하고, 몸수색 당하고, 화장실 가고, 식사까지 해야 한다. 문희는 몇 숟갈 뜨지도 못한 채 식당 직원에게 자신이 먹던 음식을 남겨두라고 당부한 뒤 달려 나간다. 수금액이 다른 직원에 비해 현저히 떨어질 경우 회사의 눈치를 봐야 하므로 어떻게든 손님을 몸으로 밀어 넣고 만원 버스에 끼어 탄다. 버스 기사의 텃세와 성적 유린의 위협 아래에 놓이며 때로는 손님으로부터 추행을 당하거나 잡상인 단속 일도 해야 한다. 문희는 쉬는 시간을 쪼개 동료들의 속옷을 빠는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어렵게 돈을 모으지만, 도리어 관리자로부터 부정한 방식으로 돈을 축적했다는 오해를 산다. 노동 현실이 드러날수록 문희는 더욱더 비현실적인 인물로 보이고, (삥땅 없이)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결말은 아이러니하다. 문희가 강제 탈의의 수모를 당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굳이 남성 상관의 시선과 교차해 자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불만스럽지만, 일단 넘어가 볼 수는 있다. 참을 수 없는 건 몸수색에 항의하며 건물 옥상에 오른 문희가 회사 관리자들에게 (혹은 관객을 향해) 돈을 빼돌린 다른 동료들을 대신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동료들에게 더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자고 호소한 것이다. 문희의 마지막 행위의 이유를 ‘몸수색에 의한 수치심’이라고 애매하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 물론 문희는 몸수색을 수치스러워하지만, 그녀가 옥상으로 내몰렸던 이유는 돈을 숨기는 동료들의 행위에 대한 수치심도 있었다. 문희는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는 것으로 노동 시장으로부터의 탈출을 상연한다. 그녀의 일화는 전설처럼 남아 모든 버스에는 ‘이문희를 기억하자’라는 문구가 새겨진다. 후배 안내원들은 이 문구를 보며 어렵고 힘들지만, 삥땅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영화 속 폐쇄된 세계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 결론이 성에 차지 않음은 물론이다. 바뀌어야 할 것은 삥땅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이들의 노동 환경이다. 그런데도 완료된 세계 바깥에 놓인 우리가 문희의 행동에 관해 오늘의 잣대로 비판할 수는 없다. 누구라도 문희처럼 세계 내부에 있을 때, 바깥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바깥으로 쫓겨난 뒤에야 비로소 내가 있던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노동 투쟁은 대부분 끝없이 내몰린 상태에서 일어난다. 부당 해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노동자들은 대부분 참고 견딘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있을 곳이 여기 밖에 없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며, 실패의 경험은 뼈아프기 때문이다. 문희가 도덕적 인물이어야 했던 이유는 그래야지만, 그녀의 고귀한 희생과 진심이 퇴색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희가 맞은 결말은 세계 내부에 존속한 상태에서 가능한 투쟁의 극단이 결국 향하게 되는 장소를 가리킨다.
오늘의 시선 속에 낯설게 보이는 것은 요금함과 카드 인식기 대신에 탑승객과 일일이 접촉하는 안내원의 손이 있었다는 사실일 거다. 기계로 대체되기 이전에 그곳에는 사람이, 특히 여성 노동자가 있었다. 이들이 손과 몸으로 힘껏 밀어붙인 것은 단지 버스의 승객만이 아니다. 자본의 광풍 한가운데에 선 이들은 산업화와 자본의 속력 속으로 승객을 떠민다. 그렇지만 아직 그들의 얼굴에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표정이 남아 있었다. 노동시장의 말단을 깊이 체험한 ‘천사’ 문희의 외침은 무엇보다 시스템 도입 이전에 인간에 대한 믿음의 회복을 호소한다. 오늘날 사라진 직업인 버스 안내원을 비롯해 노동자가 있던 자리는 빠르게 무인 시스템으로 대체되고 있다. 문희의 외침에 대한 응답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무인화된 세계에 일정 정도 편의를 누리면서도 사람이 사라진 자리가 인간을 향한 붕괴된 믿음과 이를 보충하는 감시의 증거는 아닌지 근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