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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장선우, 1996)이 발표되었던 당시나 지금이나, 이 영화를 보는 영화적 체험은 무척이나 곤혹스럽다. 예컨대 이러한 것이다. 영화는 실제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록한 푸티지(footage)를 비교적 긴 시간동안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 실제의 역사적 기록영상은 열차를 타고 있는 ‘우리들’ 중 한명(
설경구)의 얼굴로 이어지면서 허구의 세계로 봉합된다. 이어 5.18이전 김추자의 ‘꽃잎’을 부르고 있는 소녀의 얼굴 클로즈업이 등장한다. 그 다음 쇼트가, 이전 쇼트의 전체 의미, 즉 소녀는 남자들(오빠의 친구들) 앞에서 자기-전시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소녀의 얼굴은 우리들(오빠들)의 시선이자 기억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네 명이 타고 있는 기차 객실 내부를 보여주는 쇼트들이 이어지는데, 그 끝맺음을 하는 것은 맞은 편 의자에서 성적 유희에 빠져 있는 한 커플을 우리들 두 명이 관음증적으로 훔쳐보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 영화의 크레디트가 나온다.
광주와 관음증. 이 오프닝 시퀀스의 기능이 가까운 과거로, 광주라는 지정학적 공간으로의 허구적 진입이라고 했을 때, 왜 관객은 굳이 관음증적 시선이라는 매개를 거쳐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관음증적 충동의 에너지는, 영화 전반부를 휘감은 것으로서, 크레디트 이후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마자 영화적 디제시스를 지배한다. ‘장’과 ‘소녀’의 마주침은 그녀의 몸을 아래로부터 위로 훑는 장의 시선으로 묘사되고, 그것의 논리적 귀결인양 곧바로 장은 소녀를 강간한다.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소녀는 이후 장의 처소에서 반복적으로 강간과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당한다. 영화의 시작이 강력하게 소환한 역사적 사실성은, 연극 무대처럼 꾸며진 세트(장의 거처)의 밀폐된 학대 공간으로 치환된다.
영화의 서사는 세 개의 트랙으로 진행되는데, 소녀를 찾아 나선 ‘우리들’의 탐문적인 로드 무비적 갈래가 그 하나이고, 장과 소녀의 이야기가 다른 한 축이며, 마지막으로 소녀를 미치게 한, 즉 그녀의 트라우마를 구성하고 있는 ‘그 날’의 파편적 조각들이 그것이다.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탐문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소녀의 광주 항쟁 이후의 삶과 현재 진행되는 장과의 동거는 끊임없는 강간과 폭력의 연속이다. 강간을 당하는 그녀의 얼굴 위로 광주에서의 트라우마적 영상이 오버랩 된다. 국가 폭력에 성 폭력을 포개고 얹는 이 과정은 희생자를 재차 희생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남성들의 성욕은 자연적인 것처럼 전제되며 질문되지 않는다. 소녀의 미친 상태로 인하여, 그녀의 트라우마는 오로지 국가 폭력에 의한 것일 뿐인 것으로 재현된다. 강간의 피해는 그녀의 트라우마로 축적되거나 입력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피해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에, 끊임없는 성폭력은 재현의 영역에서 관음증적이고 가학적인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재현되지만, 그 폭력의 속성이나 윤리적 책임을 묻지 못한다. 소녀의 삶을 파괴한 원죄는 광주 그 곳에서 그 날 자행된 국가 폭력에 있을 뿐이다.
역사적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의 곤궁을 여성의 몸이라는 수사적 지지대를 통해 관통하려는 것, ‘미친 여성’을 통해 민족 비극을 알레고리화 하는 것, 희생된 소녀를 동원하여 역사적 죄책감을 말하려는 것, 이것은 모두 그동안 한국영화가 종종 그 유혹에 빠졌던 남성중심적인 수사학적 관행이다. 소녀가 오빠의 묘지(라고 믿는 산소)를 찾아가 마치 한판 굿을 하듯 원한을 풀어내는 영화의 절정부는 거의 20분간 진행된다. 그것은 소녀의 트라우마의 중핵이 광주에서 총 맞은 어머니의 피 묻은 손을 뿌리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폭로한다. 영화는 소녀가 모든 원한을 토해 낸 듯 그려내지만, 그녀의 몸에 가해진 무수한 물리적 폭력과 성폭력에는 끝내 입을 닫는다. 그렇다면 피해자를 재차 피해자로 만드는 것의 정치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그녀를 지키지 못하거나 함부로 다루고 뒤늦게 연민의 정의 몸짓을 표하다 자책하는, 우리들과 장, 그리고 그 위치로 안내되는 관객들의 죄책감의 연대에 대한 촉구일 것이다. 소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의 우리들의 침통한 표정과 묘지에서의 장의 망연자실한 표정, 그리고 그 위로 보이스오버 되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이 영화의 그러한 태도를 분명히 한다. 애시 당초 구체적 이름 없이 소녀와 우리들, 엄마, 오빠로 호명되는 것은 이 인물들이 각각 어떤 전형성을 띄기를 원해서였을 것이다. 텍스트 내에 관객들의 동일성을 담보하고자 한 우리들과 장의 위치는, 동시대인으로서 민중 지향적 태도를 견지하며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던, 그러나 남성 성욕의 배설적 재현에는 지독히도 관대하거나 그 정치적 효과에는 무관심했던, 동시대 지식인의 분열된 자아 위치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