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걸어서 하늘까지 장현수, 1992

by.강병진(영화저널리스트, 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 2017-06-16조회 5,944
걸어서 하늘까지 스틸

<걸어서 하늘까지>라는 제목에서 노래 가사가 먼저 떠오르는 건, 당연한 반응이다. “눈 내리는 밤은 언제나, 참기 힘든 지난 추억이,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둔 너를 생각하게 하는데…” 가수 장현철이 주제가를 불렀고, 최민수김혜선이 모닥불 앞에서 눈물 흘리며 키스하는 명장면을 남긴 드라마 <걸어서 하늘까지>(1993)가 있었다. 최민수는 거칠지만 깊은 순정을 가진 남자를, 김혜선은 그런 남자가 차마 다가설 수 없을 만큼 순수한 여자를 연기했다. 한 집에서 친남매처럼 자란 남과 여. 경찰에게 쫓기는 소매치기의 비루한 인생. 이들 앞에 나타난 모든 걸 다 가진 남자. 여자를 살리기 위한 남자의 비극적인 희생 등의 테마로 당시의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작품이다. 하지만 이보다 1년 먼저 나온 영화 <걸어서 하늘까지>도 있었다. 두 작품 모두 소설가 문순태가 1979년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드라마와 영화에 깃든 감정의 결은 상당히 다르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이렇다. 드라마 속 물새의 죽음에서 비장함과 감동을 느꼈다면, 영화 속 물새의 죽음은 당황스럽다. 

한집에서 자란 드라마의 남과 여와 달리, 영화의 물새(정보석)와 지숙(배종옥)은 일(?)을 하다가 처음 만난다. 경찰에 잡힐 뻔한 지숙을 구해준 물새는 그녀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독고다이보다는 식구를 갖는 게 낫지.” 물새의 조직원들은 모두 황새, 앵무새, 촉새, 참새 등의 별명을 갖고 있는데, 지숙은 ‘날치’란 이름을 얻는다. 한 식구가 된 이들의 팀플레이는 꽤 멋스럽다. 소매치기에 대한 영화적인 매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손기술, 그런 손기술이 더하고 더해지는 팀플레이, 무엇보다 사람을 직접 공격하는 범죄에 비해 보는 이의 죄책감이 덜한 범죄라는 점에서 말이다. 심지어 이들의 일상은 꽤 낭만적이며 가끔은 따뜻하다. 일당 중 한 명인 꼬마는 어느 날 지숙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누나 오늘 참 이쁘다. 왕조현 같애.” 그런데 이들의 발목을 잡는 것도 그놈의 낭만이다. 지숙은 어느 날 호텔에서 정만(강석우)의 지갑을 훔친다. 지갑에는 상당한 액수의 돈과 등록금 고지서가 함께 들어있다. 지숙은 자신 때문에 이 대학생이 공부를 못하게 될 거란 생각에 지갑을 돌려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만이 지숙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이때 지숙을 좋아하고 있었던 물새는 정만을 증오하게 된다. 물새는 지숙을 사랑하지만, 지숙은 정만에게 끌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하고, 그녀가 멀어질수록 정만은 집요하게 다가간다. 물새는 정만이 지숙을 갖고 놀다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만은 그런 남자가 아니다. 

<걸어서 하늘까지>는 <게임의 법칙>과 <본투킬> 등을 연출한 장현수 감독의 데뷔작이다. 더러운 독기로 보자면, 물새는 <게임의 법칙>의 용대와 ‘맞짱’이 가능하다. 물새는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하겠지 싶은 악당이 아니다. 그는 지숙을 사랑하지만, 그녀에게도 비열하다. 지숙에게 상처를 받을 때면, 자신만을 바라보는 또 다른 여자 오덕자(송옥숙)를 찾아가 위로를 강요하기도 한다. 분명 장현수 감독에게 물새는 <게임의 법칙>의 용대를 상상하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단, 용대가 가지고 있던, 나름 유쾌해 보이기도 했던 허세의 기운을 물새에게 찾을 수는 없다. 배우 정보석은 그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더해놓는 한편, 물새의 신경질적인 기질을 더 도드라지게 묘사한다. 그가 연적인 정만에게 주먹을 날리거나, 지숙에게 큰소리를 지르며 떼를 쓰는 모습들은 자기 파괴적으로 보일 정도다. 영화 개봉 당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보석은 “이전 작품에서는 주로 이성적인 인물이 대부분이서 가면을 쓸 수 없었고, 인위적으로 연기해야 했으며 인간미가 결여되어 허점이 많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내 감성에 가깝게 욕구를 폭발시켰다”고 말했다. ‘폭발’이라는 말이 맞는 듯 보인다. 드라마의 물새가 장렬히 산화했다면, 영화의 물새는 끝내 외롭게 폭발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새로운 인생을 살려고 했던 지숙은 자신이 외면했던 소매치기 일당들의 음모로 과거를 들킨다. 지숙의 정체를 알게 된 정만은 흔들리고, 또한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지숙을 위해 돈을 구하려던 물새는 사람을 죽인다. 사랑하는 여자는 떠났고, 경찰이 뒤쫓는 상황에서 물새는 자살을 선택한다. 이때 물새의 선택은 1990년대 당시로써는 매우 영화적인 선택이었겠지만, 물새는 그리 영화적인 느낌으로 자살하지 않는다. 모든 걸 내려놓는 표정이었던 드라마의 물새와 달리, 영화의 물새는 아직 미련이 많아 보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술을 마시며 자신을 말리려는 지숙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그녀를 방 밖으로 밀어낸 후, 다시 손을 떨며 술을 마신다. 영화의 초반부, 물새는 자신의 부하와 구역을 뺏어간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며 엄포를 놓았었다. 하지만 진짜 자살을 결심한 순간, 물새가 혼자 있는 방안에서 느껴지는 건 그의 슬픔과 두려움, 후회, 짜증이 뒤섞인 피로감이다. 물새는 매우 아픈 얼굴로 기어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그는 정말 힘들게 죽는다. 제발 누가 자기 대신 자기를 죽여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이렇게 죽는다는 표정이다. <걸어서 하늘까지>를 드라마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영화 <걸어서 하늘까지>를 봐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장면의 감정이다. 당시 한국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이토록 아프게 자살한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P.S 
<걸어서 하늘까지>는 장현수 감독의 데뷔작이지만, 지금 와서 다시 보면 이 영화의 각색을 맡았던 곽지균 감독의 작품들이 먼저 연상된다. 정보석배종옥의 만남에서 <젊은날의 초상>(1991)의 이영훈과 윤점숙이 떠오르고, 정만을 연기한 강석우의 모습에서 <겨울 나그네>(1986)의 민우가 기억나는 것이다. (장현수 감독은 <젊은 날의 초상>의 조감독이었으며 각색에도 참여했었다.) 물새와 지숙, 정만 등 세 남녀가 엮인 심리적인 갈등 또한 그의 영화들에서 본 듯한 감정이다. 고 곽지균 감독은 7년 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걸어서 하늘까지>를 보다가 그의 영화들을 떠올린 지금도 5월이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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