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피아골: 12월의 영화 I

by.홍은미(영화평론가) 2019-12-02조회 7,707
피아골 스틸

이강천의 <피아골>(1955)은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이 금지되었던 최초의 영화다. 더불어 반공법을 위반한 최초의 반공영화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형용모순의 수사는 <피아골>을 설명하는 데 있어 턱없이 모자란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흥미로운 면모를 살피는 데 있어서는 얼마간 유효해 보인다. 당시 이 영화는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논란이 되었는데, 주인공 애란(노경희)이 지리산을 내려와 공허한 몸짓으로 백사장을 걸을 때, 그녀가 남한사회로 귀순할지 피아골로 다시 오를지 목적이 불분명해 보인다는 이유서였다. 제작자는 이후 영화 마지막에 태극기 장면을 삽입했고, 개봉된 영화에선 지친 애란의 모습 위로 휘날리는 태극기가 디졸브 되며 이야기가 끝난다.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는 태극기가 당대에는 중요한 표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마지막 태극기만큼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 없다. 내막을 모른 채 마지막 장면을 맞더라도, 이물감이 강하게 느껴져 억지로 끌어온 장면이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피아골>은 반공영화이기 이전에, 휴전 후 지리산 피아골에 잔류한 소수 빨치산을 세밀하게 그린 탁월한 인물화다. 여는 반공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엔 남한군이나 경찰이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관념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서사를 할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관심을 두는 건 피아골에 갇힌 빨치산의 생태계와 죽음에 가까워 가는 인물들의 절박한 생존기, 무너져 가는 이념 속에서 얼룩져 가는 인물들의 초상에 있다. 멀리서 날아오는 총탄과 포탄의 피해로 아가리(이예춘) 부대의 대원들은 쓰러져 가지만, 그들에게 더 큰 공포는 지리산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다. 나약한 인물들을 지탱하고 있던 이데올로기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점차 자리를 잃어가고, 각자의 신념은 견지한 당성의 강도와는 상관없이 무너져 가며, 인물들을 저마다의 회의와 모순과 광기 속으로 빠져든다. 
 

이를테면 대장 아가리는 부대의 규율을 어긴 자들을 잔혹하게 처치하면서도 스스로는 비밀스럽게 규율을 어기며 자기모순에 빠져있고, 부대원들이 보급투쟁을 하러 부락에 내려간 사이 고요한 사찰에 홀로 남아 과오에 대한 죄의식으로 분열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비서인 애란 역시 당성이 강한 인물로 그들이 반동분자로 명명한 이들에게 잔혹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녀를 지지하고 있는 건 신념과 함께 빨치산의 규율을 지킴으로써 돌아갈 고향도 없는 자신의 운명을 피아골에 결부시키는 일이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대의 간부이지만, 영화 시작부터 혁명투쟁에 회의하고 있는 철수(김진규)는 부대의 잔혹한 행위들을 은밀하게 거부하면서도 무력하기 그지없는 표정들로 얼룩져 가는 인물이다. 외에도 부대원들은 서로 짝을 이뤘다 배신하기를 거듭하며 불안한 공동체의 마지막 모습을 아로새긴다. 사실 그들의 초상 속에 반공메시지가 스며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초상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그리며 이데올로기의 작동 시스템에 잠식당한 인물들의 항변에 이처럼 귀 기울이는 작품도 영화사에 흔치 않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피아골>은 탁월한 인물화기도 하지만, 심리의 풍경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간혹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드는 유려한 움직임과 리듬으로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세밀히 묘사한다. 또한 지리산의 견고한 바위와 유약한 풀잎들 사이, 그리고 사물들이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 인물들을 배치시키며 그들의 복잡한 심리를 형상하고 있다. 이를테면 영화는 철수와 마음을 나누는 소주(김영희)가 지대 본부로 소환되기 전까지 철수와 소주 그리고 철수를 연모하는 애란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세심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세 인물 사이의 감정적 기류를 아리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장면이 있다. 소주가 대장 아가리에게 겁탈 당한 후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다. 

숙소 안의 상황을 모르는 철수는 대장에게 보고할 사항이 있어 아가리의 숙소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애란은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대장의 명령을 받은 철수는 먼저 자리를 뜨고, 숙소 앞에 남아있던 애란은 시간차를 두고 나오는 대장과 소주의 매무새를 보고선 소주가 당한 일을 얼핏 눈치 챈다. 그러나 그녀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는다. 다만 숙소의 모퉁이를 지나가는 소주를 애란이 조용히 따르고 카메라 역시 둘의 움직임을 유유히 따를 뿐이다. 철수와 소주와 애란이 차례로 숙소 모퉁이를 지나갈 때 세 인물 사이에 흐르는 애정과 질투와 환멸과 연민의 감정은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표정과 고요한 움직임 사이에서 아릿하게 미동한다. 
 

그리고 소주가 떠난 밤, 부락으로 보급투쟁을 나서는 대원들의 모습은 나뭇잎들이 드리운 그림자로 인해 얼룩지거나 건물들이 드리운 짙은 그림자 속에 묻히곤 한다. 출구 없는 암담한 운명이 그들을 자꾸만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영화는 그들의 불안과 회의와 광기의 현장을 무섭도록 고요하게 비춘다. 이 영화를 반공영화로 보아야 한다면, 이들의 잔혹함과 광기를 치밀하게 그려서가 아니라, 이들의 침묵 속에서 저 홀로 청명한 소리를 내고 있는 계곡의 물소리가 더 깊이 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대립된 이념에 아우성치지 않고 침묵 속에 새어나오는 신음을 첨예하게 그린 <피아골>은 어느 한 범주에 몰아넣기에는 품이 넓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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