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와 관련된 두 가지 기억이 있다. 하나는 1980년대 극장가에 걸렸던 개봉 간판이다. 멀티플렉스는 존재하지 않았고, 단관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개봉관에서는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춘호와 향심의 정사 장면이 에로 영화의 한 페이지를 선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선전은 흥행을 감안한 것이기도 하지만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의 통제에 의해 허용 가능한 한국영화가 정해져 있던 탓이기도 하다. 소위 ‘3s’라는 정책의 일환 속에 <
땡볕>(
하명중, 1984) 역시 에로 영화로 포장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연이 있다.
다른 하나의 기억은 원작과 자막에 대한 것이다. 이 작품은 김유정이 쓴 동명의 말년 작품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이상과 함께 모더니스트의 자양분을 받아들였던 김유정은 가장 토속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소설에는 계급적, 사회적 비판이라는 모더니스트의 자취가 강렬하다. 영화 역시 김유정에 대한 기나긴 자막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마치 민족이나 국가관을 고취시키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맨 마지막 문장은 ““우리는 위대한 한민족”이란 말이었다.“이다. 김유정이 못다한 한 마디라며 등장시킨 이 말은 오늘날 생각해 보면 이중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국가와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군부독재의 정책에 맞추는 형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군부독재를 겨냥한 위대한 풍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땡볕>은 김유정의 원작에 충실하기 보다는 상당부분 각색을 취하면서 다양한 사건들을 전개하는 복잡한 드라마의 내용을 취하고 있다. 영화의 불균질함은 이러한 복잡함에 기인한다. 표면적으로는 군부독재의 정책에 맞추기 위해 토속적인 에로 영화를 취하면서도, 에로티시즘이 제거되는 중반 이후(대략 50분 이후)는 암울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전달하는 ‘수난시대’의 드라마로 나아간다.(초반에 에로영화였던 작품이 중반 이후 이처럼 톤을 달리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일본군(마지막에 일본 의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는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한다.)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배신하는 향심과 비극의 현실을 감내하는 순이를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의 붕괴를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내용적 핵심은 일본의 탄압이 아니라 억압의 시대에 서로를 의심하고 배신하는 공동체 내부의 붕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땡볕>은 일제 강점기의 영화가 아니라 군부독재가 내면화되는 1980년대 중반의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인 것이다. 우리는 이 현실이 붕괴되는 <1987>을 기다려야만 했다.
오늘날 관객들은 에로티시즘으로 가득 찬 영화의 초반부가 불쾌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에로티시즘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시선과 톤도 그러하고, 춘삼의 아내인 순이 역의
조용원은 당시 미성년자였다. 최고의 하이틴 스타 중 한 명이었던 조용원은 등장과 함께 지니고 있던 순수한 이미지와 함께 남편을 위해 몸을 허락하고 끝내 죽음을 선택하는 너무나도 순응적인 여성상을 연기하고 있는데, 그녀가 강간을 당하는 장면 자체에 대한 불편함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에로티시즘을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실질적으로 에로티시즘을 지배하는 캐릭터는 마을에서 술을 파는 향심이다.
이혜영이 연기하는 향심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압도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영화의 중반 이후 그녀의 비극적인 사연이 드러나면서 바닷가 마을에서 술과 몸을 파는 장면은 에로티시즘과는 정반대이다. 그녀의 몸은 순이와는 또 다른 버전의 수난사에 지나지 않고, 심지어 바다 마을에서의 장면은 매춘이 아니라 강간의 이미지처럼 보인다.
여성을 대상화한다는 이 장르의 한계는 뻔하지만 영화의 전반부가 아니라 전부를, 향심의 에로티시즘이 전환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되면 <땡볕>에 대한 불쾌함은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시대의 그림자로, 이 영화가 속한 시대의 불편함으로 전환된다. 그 가운데 전반부에는 향심에게 농락당하며 아내 순이를 학대하고,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주인공 춘호가 후반부에는 향심의 현실을 목격하고 아내에게 돌아가 후회의 삶을 사는 반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두 여인을 오가는 춘호는 어리석은 남자의 전형일 뿐만 아니라 두 여인을 모두 잃어버리는 방황하는 시대적 인물이다. <땡볕>의 마지막 장면은 펠리니의 <길>의 마지막 순간을 빌려온 듯 짐슴 같던 인간이 후회와 회환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인간적 순간으로 마무리 된다.
이외에도 <땡볕>은 많은 것을 전시하고 노출시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지주이자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주사에 의해 착취를 당하는 마을 여성의 자살한 시체를 거두는 장면과 향심을 달구지에 태우고 향심의 삼촌(실제로는 남편이었다.)을 만나러 가는 장면의 교차 편집이나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이주사의 집을 불태우고 자신의 물건을 챙기기 위해 춘호가 집으로 오는 장면의 교차는 너무나 직접적인 은유여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비극적 죽음과 에로티시즘을 직접적으로 교차시키는 달구지 장면은 야하기보다는 인물들을 향한 분노를 머금게 만든다. 그것이 이 영화의 숨은 목표 중 하나였다면? 이러한 장면들이 읽히지 않는다면 <땡볕>은 한낱 에로 영화에 지나지 않겠지만 봉기를 일으킨 춘호의 친구 중 하나가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학대를 당하고 끝내 가족들을 데리고 마을을 떠나는 장면은 누가 뭐래도 군부독재에 저항하던 현실을(아마 광주를 호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떠오르게 한다.
춘호 역을 한 하명중 감독은 군부독재 시대를 거스르며 1970년대의 가장 중요한 한국영화를 만들어 낸
하길종 감독이 지닌 ‘불균질함’의 유산을 따라 영화를 매끄럽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장면과 정서를 충돌시키고, 불가해한 장면들을 집어 넣으며 시대의 혼란함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땡볕>의 에로티시즘 속으로 구겨 넣어 버렸다. 어떤 장면들은 하길종의 <
한네의 승천>(1977)을 떠올리게 하고(가령 뱀이 등장하는 일련의 장면들), 병원에서 분노한 춘호가 간호사의 목을 조르는 장면은 배신자 춘호마저도 민중적인 분노를 지닌 한 인간으로 구원해 내고 있다. 또한,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함께 시대의 은유를 다뤄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너무나 많은 이미지와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전하는 에너지와 비극의 정서 때문에 영화는 눈을 끌어 당기고 있다.
백번 물러서서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즐겨 다루는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을 생각해 보자면 앞으로도 이러한 내용이 다뤄지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도시의 스릴러나 경성을 배경으로 한 이국적인 풍경이 무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강원도의 산골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공동체 안의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몰락의 과정들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반문해 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당시 한국영화로는 드물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공개가 되었을 것이다. <땡볕>은 걸작의 반열에 올리지는 못해도 최소한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해하는 주요한 관문 중 하나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