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감독은 <
코리아>(1954)를 만들면서 영화를 “온 몸으로 배웠다”고 썼다. 석굴암을 촬영하러 올라가다가 지프가 굴러 떨어져 죽을 뻔하기도 했고 추운 창고 건물에서 벌벌 떨면서 포터블 편집기로 편집을 하는 동안 “영화의 흐름과 감각”을 “몸의 한 부분으로 체화”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폐허에서 가산을 털어 만든 이 가난한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신상옥은 뒷날의 많은 “역사극과 문예영화의 기초”가 된 작품이라고 술회한다. 특히 <
무영탑>(1957)과 <
성춘향>(1961)은 <코리아>에서 다룬 이야기의 일부를 독립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신상옥, 『난, 영화였다』, 랜덤하우스, 2007, 53~54쪽) 1960년대 초까지 신필름 기술력의 핵심이자 평생의 친구였던
이형표를 만난 것도 <코리아>의 후반작업을 하면서였다.
최은희와의 스캔들로 선배 영화인들이 신상옥의 작품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었던 이가 바로 공보처 산하 대한영화사의 사무장이었던 이형표였던 것이다.
당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었던 두 청년(신상옥은 1926년 생, 이형표는 1922년 생)은 공통점이 많았다. 식민 말기의 전시체제 아래서 예술에 심취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해방 후에 영화에 입문했다는 점이 일단 그렇다. 10대의 신상옥과 이형표는 둘 다 그림에 몰두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도피주의적 성향과 관련해서 보자면,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탐독하며 유럽의 관념철학에 빠졌던 이형표 쪽이 더 분명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아름다운 것을 쫓아 예술에 탐닉하는 것으로 험악한 세월을 견뎌내기로는 신상옥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유미주의적 성향은 1920년대에 태어나 10대와 20대 대부분을 전쟁 통에서 보냈던, 그럼으로써 일찍부터 삶의 허무를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세대 예술가들이 어느 정도는 공유하고 있던 것이다.
영화계에서의 처지 또한 비슷했다. 집단 따돌림을 당했던 신상옥 만큼은 아니지만, 이형표도 선배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이형표는 1950년을 전후한 시기에 미공보원(USIS)에서 일했는데, 이때 이필우 휘하의 기술 인력들은 미공보원의 하청을 받아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미공보원이 영화를 직접 제작하는 조직개편을 하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 영화인들은 그것이 통역을 했던 이형표 탓이라고 생각했고 이형표의 부역 전력을 발고했다. 이로 인해 이형표는 부산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미공보원에서도 해고되었다. 영어 능력을 바탕으로 영향력 있는 미국인들과 교류를 쌓았던 덕에 그 이후에도 커리어를 쌓는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도 그는 선배 영화인들의 미움을 샀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배들과 선을 그으며 활동했던 것은 오히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전후 한국영화의 새 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보인다. 식민 말기에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영화 만들기를 익혔던 선배들은 도제제도의 강력한 위계관계에 얽매어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기자재에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전후 원조의 일부로 미국의 아시아재단이 한국에 들여와 설치한 휴스턴 자동현상기가 영화인들의 거부감 때문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던 것은 단적인 예다.
<꿈>(1955)
아시아재단의 한국영화 원조 프로젝트를 입안하고 실행했던 존 밀러(John Miller)는 ‘일거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구세대 영화인들 일부가 퍼뜨린 근거 없는 악소문 때문에’ 한국 영화인들 사이에는 자동현상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고 아시아재단 본부에 보고했다. 영어로 소통할 수 있고 영화계의 낡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새로운 기자재에 훨씬 개방적이었던 젊은 영화인들에게 이 미국인 조력자가 더 호의적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존 밀러는 전후 한국영화 중흥의 신호탄이 되었다고 평가받은
이규환의 <
춘향전>(1955)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신상옥의 <
꿈>(1955)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보았다.
탈식민의 과제를 안은 채 냉전체제로 편입되어갔던 1950년대의 시대적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존 밀러가 이규환보다는 신상옥에 주목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신상옥과 이형표 또한 냉전의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에서 미래를 보았다. 멜로드라마로 대중영화의 흥행감각을 익히는 한편으로 영화사를 운영하며 기업적 발전을 모색했던 신상옥이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Theodore Conant)와 함께 휴대용 자기녹음기로 다이렉트 시네마 스타일의 <
위기의 아이들>(1955)을 만들거나 파라마운트사의 <휴전 Cease the Fire)> 촬영에 참여하여 입체영화 기술을 경험하고, 16mm 코다크롬으로 컬러영화를 시도하면서 미국 발(發) 신기술을 통해 시각적 체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신상옥이 제작, 감독하고 이형표가 촬영한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춘향>(1961)의 성공은 개인적 수준에서는 그들이 각자 1950년대 동안 쌓아온 역량이 결합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좀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식민지 문화로부터 냉전문화로의 변화가 극적으로 발현된 사건이었고 영화계 내부에서는 중심 인력의 세대가 교체되고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모델로 한 새로운 산업 시스템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화기술의 유력한 출처이자 표준으로서 미국영화가 부상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당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상옥-
최은희의 <성춘향>과
홍성기-
김지미의 <
춘향전>간의 대결이 <성춘향>의 승리로 귀결된 것은, 한국영화사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홍성기는 1924년 생으로 신상옥과 비슷한 연배였지만 일제 말에 만주영화협회에서 영화를 배웠고 선배 영화인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경작(競作) 소동이 영화계의 신구파 대결로 표출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춘향전>을 옹호하는 구파와 <성춘향>의 편에 선 신파의 대결은 신파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곧 신필름이 이끌어갈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구세대의 지원을 받았던 홍성기는 젊은 신상옥에게서 발견되는, 산업과 기술 그리고 영화미학에 대한 진취적인 비전과 모험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고전 ‘춘향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만든다는 기획 자체가 애초에 신필름의 것이었거니와, 뒤늦게 제작에 뛰어든 홍성기 팀은 새로운 미학적 경지를 보여줄 만큼 신기술을 구사하는데 능숙하지 못했다. <춘향전>이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는지 처음부터 산업적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1950년대 말 최고의 흥행감독이었던 홍성기는 한국영화가 새롭게 도약하는 1960년대 초에 영화계의 주도적 위치에서 밀려났다.
거의 테크니컬러에 육박하는, 현재까지도 퇴색하지 않은 <성춘향>의 아름다운 색감이 얼마나 대단한 기술적 성취였는지는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일반화된 1960년대 말 이후의 한국영화들과 견주어보았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것은 1950년대 동안 미국영화의 신기술을 탐구해왔던 이형표가 영어로 된 기술서적을 열독하면서 장면마다 일일이 색온도를 재어가며 공들여 찍은 결과였지만, <성춘향>의 기술적 성공은 단지 아름다운 색감으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 유려한 카메라워크와 배우의 매력을 십분 살리는 효율적인 나눠찍기, 깊이 있는 공간구성은, 마치 초기 영화나 발성영화 초기의 작품들처럼 정면 롱 쇼트(tableaux)의 롱 테이크 위주로 구성된 <춘향전>과 현격히 구별된다.
기술이 예술적 표현을 제약하는, 신기술 도입 직후의 일반적인 상황을 뛰어넘은 <성춘향>의 성취는 기술이 예술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비용, 재능과 노력을 과감히 투여한 결과였다. 컬러 시네마스코프는 많은 조명 장비가 요구될 뿐 아니라, <성춘향>에서처럼 커트를 자주 나눌 경우에는 그때마다 현장을 다시 세팅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신상옥은 촬영에 필요한 코닥필름을 미국으로부터 직수입하여 사용했는데 여기에도 많은 돈이 들었다. (당시 많은 한국영화들이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미군부대 주변의 암시장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자투리 필름을 구입해 썼다. 홍성기의 <춘향전> 또한 그와 같은 경로를 통해 필름의 많은 부분을 조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감한 투자는, 결과적으로 서울 개봉관에서 관객 38만 명을 동원한 유례 없는 흥행 성공으로 보답 받았지만, 당시 한국영화의 시장 규모를 가늠했을 때 이는 무모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성춘향> 이전에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서울 개봉관에서 불과 10만 명을 동원한 이규환의 <춘향전>이었다. 기존 시장에서는 회수할 수 없는 제작비를 투여한 <성춘향>은 한국영화의 시장규모 자체를 확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치 할리우드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를 만들 때 그러했듯이, 신상옥은 <성춘향>으로써 영화시장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결과적으로는 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이끌었다. (실제로 셀즈닉은 신상옥이 모델로 삼았던 할리우드의 창의적인 제작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모험을 불사하는 진취적인 기업가 정신이 신상옥의 추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대작 <성춘향>의 기획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성장해온 흥행산업의 잠재력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승산 없는 도박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 시기와 전후 얼마 동안은 기술과 자본이 아니라 사람의 힘에 의존하는 공연예술이 대중오락의 중심을 이루었다. 1930년대부터 이미 융성했고 전쟁 기간 동안에도 선무공작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악극과 여성국극은 형편없는 기자재와 낮은 기술력, 자본의 빈곤으로 조악한 만듦새를 보여주었던 한국영화를 압도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전후 복구에 투여된 미국 원조자금의 일부가 영화계로 들어오면서 기자재가 갖춰지고 서울의 개봉관과 지방 극장들을 잇는 배급망이 확보됨에 따라 영화산업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악극과 여성국극의 작가와 레퍼토리, 배우들과 그들이 무대에서 발전시켜온 캐릭터들, 조명, 미술, 의상 분야의 스태프들을 흡수하면서 1950년대 말 한국영화는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흥행시장의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었던 <성춘향>의 대중적 흡인력은 기술적 완성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1950년대 동안 대중과 교감하며 쌓아온 공연예술의 자산들을 효과적으로 영화에 끌어들인 결과이기도 했다. 두 주인공 최은희와 김진규는 나이가 많아서 적역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극을 이끌면서 조연들이 마음껏 개성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을 만든다. 능청스럽고 익살맞은 악역(변학도)을 맛깔나게 소화한
이예춘을 비롯하여 방자의
허장강, 향단의
도금봉, 그리고
양훈,
김희갑,
구봉서 같은 배우들은 악극에서부터 구축해온 캐릭터를 끌어와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고전 ‘춘향전’ 자체가 영화 뿐 아니라 공연예술을 통해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레퍼토리였는데, 특히 여성국극이 그려낸 화려하고 웅장한 스펙터클의 세계는 민족의 과거를 판타지의 무대로 만들곤 했다. 1950년대 후반의 사극영화들 대부분이 레퍼토리와 시각적 효과에서 여성국극에 빚지고 있거니와 특히 화려한 색감과 넓은 화면의 <성춘향>은 여성국극이 보여준 전통의 스펙터클과 판타지로서의 역사를 영화로 가져온 최고의 성공사례라고 할 만하다.
전통의 스펙터클을 통해 역사를 판타지로 구성하는 것은 민족의 역사를 문화의 차원으로 회수하면서 특정한 미의식과 연관시키는 문화민족주의의 소산이다. 독립의 전망이 희미해져갔던 1930년대 이후에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정체성 확보를 주권의 회복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지역의 전통문화로부터 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신상옥이 말했듯이 그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 역사는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한국의 역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났”던 세대, 다시 말해 민족국가의 학교제도 안에서 역사교육을 받는 대신 전통을 미적 대상으로 삼는 문화민족주의를 통해 역사에 대한 초월적인 감각을 습득한 세대에 속했다. 그와 같은 감각은 로컬리즘 담론과 그에 기반한 문학, 영화, 공연예술들을 통해 재생산되었으며, 신상옥이 말했던 것처럼 해방 이후까지도 “역사극과 문예영화의 기초”가 되었다. <성춘향>은 미적 대상으로서 전통이라는 문화민족주의가 미국영화의 테크놀로지를 만남으로써 만개한 작품이었고 그런 점에서 냉전시대의 한국영화가 새롭게 출발하는데 식민의 문화적 유산이 어떻게 전유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탁월한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