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장남: 4월의 영화 Ⅰ 이두용, 1984

by.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교수) 2019-03-29조회 9,657
장남 스틸
1984년도에 완성된 이두용 감독의 가족 드라마 <장남>은 1970년대에 개성 있는 저예산 액션영화로 유명해졌지만 예술성으로는 큰 평가를 받지 못했던 감독이 1980년대에 만들어냈던 문제작의 연속들 가운데 놓이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파악되듯이, 80년대 경제성장의 열차를 타고 급격하게 변모된 도시 생활상을 배경으로 집안의 무게를 짊어진 장남과 부모세대의 갈등을 그린 건전한 가족 드라마로 내심 판단해버리고 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남>은 이러한 우를 범해서는 안 될 문제작 중의 문제작이다.  

<장남>은 <최후의 증인>(1980),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1985)과 같이 이두용의 영화작가로서의 자의식을 담은 작품이며, 2000년대 이후 재발견되고 있는 이두용의 작가성 연구에 있어 반드시 가치 평가되어야 할 영화다.

이두용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화된 <장남>은 1980년대 초중반 급격한 도시화율과 함께 각종 분리와 분화로 인해 도시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시대를 배경으로 놓는다. 강남 아파트 단지 개발로 인해 중산층 모두가 아파트 생활자를 꿈꾸던 때, 농어촌 정책 부재로 삶의 터전을 떠나버려야 했던 수많은 고향 이탈자들이 서울로 몰려들며 서울은 더욱 복잡해지고, 더욱 거대해지고, 더욱 속도가 빨라지며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국민들의 비판 의식을 차단하기 위해 고안된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으로 인해 <애마부인> 류의 에로영화가 최고 흥행 장르가 되었던 것과 동시에, 도시 중산층의 민주화 지향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류의 사회비판 멜로를 찾고 있었다. 억압과 유화의 위로부터의 문화정책과 맞서 아래로부터는 저항의 문화가 확산되어 가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한국영화에 곧잘 투영되었다. <장남>은 그 경향성을 반영한다.  

고향 마을이 수몰지구로 선정되어 농사를 짓고 살아가던 노부모(김일해, 황정순 분)가 갑작스럽게 서울로 상경하게 되면서 이야기의 갈등 구조가 형성된다. 장남(신성일 분)은 컴퓨터 회사의 유능한 기술개발자이며 교사인 아내(태현실 분) 덕택에 해외 유학도 다녀오고 서울 사대문 안에 이층 양옥집도 소유하고 있는 자수성가한 현대인이 표본이다. 그에 비해 두 남동생과 두 누이들의 생활은 많이 처진다. 머리 좋은 장남에게 가족의 모든 지원을 쏟아 부었다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뻔한 전사들을 영화는 과감히 생략하고 부모가 상경한 현재 일어나는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장남과 여러모로 대조적인 차남(김희라 분)은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걸핏하면 아내를 때리고, 첫째 형의 지원 덕에 대학을 마치고 사회생활 중인 막내아들(김성수 분)은 착하지만 집안 내분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한다. 일이 바쁜데다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부모를 홀대하는 듯한 장남이 못마땅한 누나(문정숙 분), 그리고 가난한 처지에도 자식 욕심이 많은 여동생이 있다. 

그 누구도 부모와 함께 지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익숙하지 않은 도시 생활 속에서 힘겨워 하는 노부모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장남은 부모 형제가 함께 살기 위해 오래전에 계획했던 집짓기를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행복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 터. 집짓기에 매진 중인 상황에서 어머니가 지병으로 임종하고, 불행은 겹쳐 제주도 지사로 파견나간 장남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은 어머니를 담은 관이 고층 아파트 곤돌라를 타고 흔들리며 아래로 내려오고 있던 순간이다. 장남은 죽어서 철사 줄을 타고 내려오는 비극만은 막아달라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전형적인 가족 갈등을 다루지만 <장남>은 플롯 전개나 캐릭터 표현에서 전형성을 탈피한다. 액션과 미스터리로 단련된 감독의 장기는 이 평범해 보이는 가족 드라마를 보다 묵직한 사회 드라마로 만든다. 그로테스크한 무드 속에 쉽게 예측되지 않는 복잡한 캐릭터들의 향연을 지켜보는 재미가 풍성한데, 전형적으로 전개되는 듯한 서사 과정에 놓인 개별 캐릭터들의 사사로운 단편들은 이두용 영화다운 어두움과 메시지의 성공적 결합의 한 요소들로 기능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가족들의 수많은 요구 때문에 지친 장남이 요정 여성과 맺는 부적절한 관계 묘사, 늙은 부모의 눈에 비친 어지러운 도시 생활상을 묘사하는 촬영 기법과 사운드 운용, 너무 늦은 도착 때문에 좌절하는 아들의 비통함을 표현하는 편집 기법 등은 한 장면 한 장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가족 간 갈등을 유발하는 악역인 것 같은 첫째 며느리의 난데없는 분노 표출은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게끔 서사는 개연성을 가지고 전개되며 이로 인해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를 구축한다. 
 
자식들이 나빠서 부모를 죽음으로 몬 게 아니다. 이들은 모두 최선을 다했으나 욕망과 생활이 어지럽게 얽힌 치열한 도시 생활에 여유가 없다.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쫓겨난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들의 도시적 삶에 적응할 힘이 없다. 애정과 혈연으로 감내하기에는 두 세대의 문화와 인식 차가 크고, 이 모든 것을 봉합한 채 함께 모여 살고자 했던 장남의 꿈은 헛된 꿈일 뿐이다. 완성하지 못한 온가족만의 대저택, 아들의 품에서 마지막을 고하고자 했던 어머니의 실현되지 못한 희망은 현대인의 상실감에 대한 은유다. 울리기보다는 차갑고 냉정한 현실에 멍해지게 하는 영화는 각자 가슴 속에 뼈아픈 메시지를 품고 다시 일어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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