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바쁜 영화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모든 관객이 같은 스크린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극장의 스크린은 인간의 신체보다 크고 인간의 눈은 생각보다 작은 이미지에만 집중할 수 있다. 어떤 관객은 스크린 중앙에 등장한 주연 배우의 얼굴을 보겠지만 어떤 관객은 스크린 왼쪽 아래의 풀과 나무가 흔들리는 것에 집중할 수도 있다. 어떤 관객은 전경의 인물에 집중한다면 또 다른 관객은 후경의 건물에 집중할 수도 있다. 100명의 관객이 있다면 100개의 서로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 어떤 관객도 옆에 앉은 관객과 같은 영화를 볼 수는 없다.
많은 경우 감독들은 화면의 구도와 배우의 연기, 클로즈업 같은 촬영을 통해 관객이 스크린 상의 특정한 지점을 보도록 유도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선택하는 감독도 있다. 즉 의도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연출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감독들은 스크린에 복수의 피사체를 한꺼번에 보여주거나 여러 가지 사건을 동시에 발생시킴으로써 관객이 어디를 보아야 할지 쉽게 결정 못 하게 만든다. 또는 관객이 자신의 시선을 던질 곳을 자유롭게 결정하게 만든다. 이런 미장센은 때로 기분 좋은 혼란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는 자크 타티의 영화들이나 오즈 야스지로가 연출한 세 사람 이상이 대화하는 장면들을 볼 때 이런 재미를 느낀다. 내 눈은 스크린에 맺힌 이미지를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이런 연출은 오히려 능동적인 감상의 계기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유현목 감독의 <
수학여행>(1969)도 이런 즐거움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섬마을 초등학생들의 짧은 서울 여행을 그린 이 작품은 필연적으로 많은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구봉서 배우가 선생님으로 나와 서사를 진행시키는 역할을 맡긴 했지만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고 스크린을 채우는 건 결국 아역 배우들이다. 이 아이들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네마스코프 비율의 화면을 가득 채운 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관객들의 눈을 피곤하게, 그리고 즐겁게 만들어준다.
이 영화에 출연한 대부분의 아역들은 비전문 배우였다고 한다. 짐작건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거의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대사를 받은 배우가 화면 중앙에서 말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좌, 우, 뒤에 있는 아이들은 자꾸 몸을 움직이고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다. 영화를 보고 있는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아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그 자체가 아이들의 지금 마음 상태와 개성을 보여주는, 생동감 넘치는 영화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겨우 숙소를 찾은 아이들이 방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이다. 낮 동안 열정적으로 뛰어 놀았던 아이들은 하나둘 잠이 들고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다. 뒤척임과 같은 작은 움직임만 허락된 그 조용하고 정적인 순간의 느낌은 매우 사랑스럽다. 또한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선생님만이 아직 잠에 들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아이들을 걱정하는 모습은 감동적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송별회 장면이다. 영화 내내 ‘질서’와는 거리가 멀었던 시골 아이들은 도시의 초등학교를 방문해 처음으로 부동의 자세로 줄을 맞춰 선다. 영화는 이 모습을 롱숏으로 보여주며 질서정연한 미장센을 각인시킨다. 결국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몽영화의 역할을 수행하는 건가 싶어 조금 섭섭해질 때쯤, 감독은 다시 한번 아이들의 자유로운 몸짓을 통해 이 딱딱한 구도를 완전히 흐트러트린다. 시골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을 향해 뛰어가고, 도시 아이들도 시골 아이들을 향해 뛰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다시 제 맘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앞서 말한 기분 좋은 혼란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다. 결국 이 씬은 문자 그대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스펙터클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스크린의 어떤 곳을 봐야 할지 결정 못 해 매번 어리둥절하기는 하지만 <수학여행>은 영화 감상의 즐거움 중 하나를 생생히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활기 넘치고 혼란스럽고 자유로운 미장센과 그 분위기를 많은 관객들이 느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