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자매의 화원 신상옥, 1959

by.듀나(영화평론가) 2017-12-22조회 2,701
자매의 화원 스틸
신상옥의 1959년 작 멜로드라마 <자매의 화원>은 전통적인 제인 오스틴 소설 상황에서 시작된다. 유능하지만 가난한 의사 남 박사가 아름다운 두 딸과 어린 아들에게 빚만 남겨놓고 병으로 죽는다. 양갓집 규수라는 타이틀을 제외하면 직업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두 딸에겐 결혼만이 유일한 선택처럼 보인다. 다행히도 어머니가 죽은 뒤로 가족을 이끌어 온 큰딸 정희는 그 집안과 가깝게 지내는 젊은 화가 동수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 하지만 동수는 작은딸 명수와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이 결혼하자 정희는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여관(이라고 쓰고 요정이라고 읽는다)의 마담이 된다. 마침 아버지의 제자인 젊은 의사 순철이 정희를 좋아하지만 이 둘의 사랑은 제인 오스틴 소설의 커플들이 대부분 그렇듯 타이밍이 잘 맞지 않는다. 이때 정희에게 마담 자리를 제안한 아버지의 옛 환자 방사장이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정희는 방 사장의 청혼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자신의 과거가 순철의 경력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따라야 할까? 

모든 옛 시대의 예술작품들은 세 가지 층으로 분리된다. 그들이 성취하려고 한 목표, 그들이 실제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이미지, 그리고 미래(그러니까 현대)의 감상자들이 실제로 보는 것. 첫 번째 층과 두 번째 층은 대부분 만들어진 직후부터 틈이 보인다. 하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을 만드는 변수는 두 번째 층과 세 번째 층 사이에 있다. 창작자는 두 층 사이의 간격이 존재하지 않길 바라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대부분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작품들은 그 벌어진 간격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가 붕괴되지 않는 경우에 속한다. 운이 아주 좋은 경우엔 그 간격이 그 작품을 더 재미있게 만들기도 한다. 

<자매의 화원>으로 돌아가 본다면, 이 영화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층 사이의 간격이 크게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의 야심은 신상옥이 1959년에 무리 없이 도달할 수 있는 딱 그 지점에 맞추어져 있고 지나치게 멋스러움을 추구하는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다. 오스틴의 소설이 그렇듯, 신상옥의 이 영화엔 감상주의나 신파 감성이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배배 꼬인 사각 관계 속에서 갈등하는 네 사람의 이야기로 로맨스를 꾸밀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어조는 신중하고 차분하다. 연인들의 오해는 불필요한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비교적 빨리 풀리고, 한 남자를 둔 자매의 전쟁 같은 것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언니의 남자를 사랑하게 된 동생이 맨 먼저 한 일은 언니에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고 언니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며 언니 역시 그런 동생을 최대한 이성적으로 대한다.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큰 감정의 굴곡은 없다. 두 자매의 짝은 처음부터 정해졌고 이들이 정해진 길을 가려면 약간의 오해와 사회적 편견만 제거하면 된다. 

이 영화에서 멜로드라마보다 더 중요하고 실제로 주인공의 행보를 결정짓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다. 한 마디로 자매에겐 돈이 없다. 순철의 자기희생으로 아버지의 빚은 갚았고 명희가 결혼해서 입을 덜긴 했지만 그림을 잘 팔지도 못하는 화가 동수도 가난한 건 마찬가지이다. 명희가 결혼 전부터 꿈꾸었던 양장점을 차리는 데에도 돈이 들어가고, 어린 남동생을 부양하는 데에도 돈이 들어간다. 동수가 양장점을 차리기 위해 친구의 공금을 빌렸다면 더욱 그렇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정희의 선택을 결정짓고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유발하는 것은 모두 돈, 정확히 말하면 돈의 결여이다. 

현대 관객들에게 낯설고 흥미로워 보이는 것은 정희가 영화 중간에 받아들인 여관 마담이라는 직업이다. 명희에게 마담 자리를 제안하는 방 사장은 아버지 남 박사 때문에 목숨을 건진 부유한 남자로 영화 내내 중후한 신사 캐릭터를 맡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양갓집 처녀에게 평생의 짐이 될 수 있는 그 직업을 제안하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재미있는 것은 정희 역시 그 제안을 그렇게까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립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정희에겐 여관 마담이 되는 것이 절실하게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신랑감을 구하는 것보다 더 당당한 선택이다. 당시 여성들에게 극히 제한되었던 사회적 진출의 기회와 경제적 위기가 정희를 이런 선택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하는 좁은 틈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모든 게 당연한 품위 속에서 진행된다. 

문제가 있다면 당시 관객들과는 달리 지금의 관객들은 방 사장의 캐릭터와 그의 제안에 대해 훨씬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매의 화원>이라는 50년대 영화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층을 갈라놓는다. 방 사장은 50년대 한국 영화 속 중년 남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품위와 절제를 갖고 행동하며 결국 정중하게 정희를 포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방 사장의 태도를 의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가 안전한 멜로드라마 조연의 역할을 맡았다고 해서 50년대 한국 중상층 중년 남자들로 구성되었고 결국 대부분이 정희의 고객일 수밖에 없는 집단에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들이 정희를 어떻게 대하는지 슬쩍 엿볼 기회를 얻지만 아마 그게 정희가 겪은 경험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관객들은 이 규격화된 깔끔한 과정과 결말을 의심하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50년대 한국 남자의 시야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그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무엇을 검열했을지를 상상하게 된다.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담 자리를 맡을 수밖에 없었던 양갓집 처녀를 다룬 이 단아한 흑백영화는 십여 년 뒤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올 호스티스 영화들의 전주곡처럼 보인다. 물론 그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방패가 되어 줄 집안도, 뒤에서 짝사랑하며 청혼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전도유망한 의사도, 옆에 안겨 술 따라주는 여자를 같은 계급 남자들에게 공급하는 주제에 시치미 뚝 뗀 위선 속에서 고상한 말만 하고 있는 보호자도 없었다. 위선이 벗겨지고 필름에 지저분한 색이 입혀졌으며 모든 게 더러워지고 적나라해졌다. 하지만 정희와 명해 자매가 필사적으로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던 50년대 말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심했다면 더 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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