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윤종빈 감독의 <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군대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절대 따르지 않으면서 결국 다른 이들마저 불편하게 만든 남자.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다수의 문제인 것일까. 아니면 적당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한 그의 문제일까. 저예산 영화인 <용서받지 못한 자>는 영화평론가협회와 디렉터스컷 영화상에서 신인남우상을 받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
3년 뒤,
윤종빈 감독은 상업영화 <
비스티 보이즈>로 돌아온다. <비스티 보이즈>는 군대만큼 폐쇄적인 강남 호스트바의 세계를 보여준다. 군대와 호스트바는 전혀 다른 이미지이지만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군대에서 제대한 승우는 집안이 몰락한 것을 알게 된다. 이미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던 누나 한별을 만나고, 남자친구인 재현의 소개로 승우는 청담동 호스트바에서 일하게 된다. 곱상하게 생긴 승우는 금방 인기를 얻으며 잘 나가는 호스트가 된다. 손님으로 온 호스티스 지원을 만나게 되고,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비스티 보이즈>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밑바닥을 보여준다. 낮에는 금융과 IT 산업의 중심인 강남이지만 밤에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신한다. 잘 나가는 남자들이 룸싸롱에서 호스티스를 끼고 술을 마신다. 남자들에게 시달린 호스티스들은 다시 호스트바를 간다.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살 수 있는 세계. 조금만 빈틈이 보이면 파고들어 ‘공사’를 치는 남과 여. 누가 포식자인지는 막판에야 알 수 있다.
승우는 새로운 세계에 잘 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원과 사귀면서 내심을 드러낸다. 승우는 이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잣집 아들로 자라났고, 취향도 있고, 폼도 잡고 싶은 승우는 이곳이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희들과 달라!” 그것이 <
비스티 보이즈>의 비극이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잠깐 일하는 거야.” 지원에게 그렇게 말한 승우는, 지원의 생활을 의심한다. 자기 말고 다른 애인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집에 남자가 들어온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길에서 지원을 때리기까지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딘지 망각한 것이다. 아니 이 세계는 허상일 뿐이고, 언젠가 나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믿고 있다. 그렇기에 승우는 스스로 몰락한다.
승우와 대비되는 인물은 지원이 아니라 재현이다. 호스트바의 리더인 재현은 오로지 순간의 즐거움만을 쫓는다. 만나는 모든 여자는 ‘공사’의 대상이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계단일 뿐이다. 재현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는 빚쟁이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재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또 누군가를 공사 쳐서 막으면 되는 일이니까. 재현은 이곳이 자신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만을 위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재현은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고 그 어떤 것에도 번뇌하지 않는다.
<
비스티 보이즈>는 사회의 밑바닥이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화려하고 돈도 많은 양아치와 화류계 인생을 적나라하게 아니 아주 날카롭게 한 지점을 파고든다. 현실을 거부하며 이상을 좇지만 결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승우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재현.
빚쟁이에게 쫓기던 재현은 한별에게 애걸한다. 한별은, 자신을 담보로 빚을 내면서 재현에게 돈을 빌려준다. 그다음 장면은, 발리 구두를 사는 재현의 모습이다. 역시 이 인간은 변하지 않았구나. 누군가의 순정이나 진심 같은 것은 애초에 관심이 없는 ‘소시오패스’. 한별에게 받은 돈으로 명품 구두나 사 신는 한심한 놈. 하지만 오산이었다. 재현은 단지 사치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일본으로 도망가, 그곳의 호스트바에서 재현은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큰 공사를 쳤으니까 잠시 피해야 한다는 계략을 세우고 바다를 건넌 것이다. 교활함. 재현은 결코 화류계의 현란함에 휩쓸려 몰락하는 유형이 아니다. 타인을 짓밟고 대신 불구덩이에 누군가를 집어 던진 후 그의 머리를 짓밟고 일어서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들이 화류계만이 아니라, 사회의 밑바닥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전체에 득시글거린다.
그러니까 승우는 죽어야 한다. 지원을 의심하는 승우는 사실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다. 있지 말아야 할 세계에 있는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존재는 지원라고 승우는 착각하고 혼자 믿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지원은, 이 세계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심으로 나만을 사랑하고, 나만을 바라보는 여인이 되어야만 한다. 유아적인 생각에 몰두한 승우는 결국 자신의 일상마저 파괴하게 된다. 여기가 아니라면서 다른 것을 바라보던, 그러나 이 세계에서 발을 뗄 생각을 하지 않는 승우는 반드시 파괴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다만 유감은 굳이 지원을 희생시키면서 승우를 몰락하게 만드는 설정이다. 그것이 아니었어도, 지원을 굳이 찾아가 해하지 않더라도 승우는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다. 승우의 결정은 10년 전의 한국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나만의 여인은 순결하고, 지고지순해야 한다는 소위 ‘한남’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반영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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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티 보이즈>는 단지 청담동 호스트바의 그들만이 아니라 보통의 한국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10년 전에 이미 한국 남자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망상의 바다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스티 보이즈>는 선구적인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