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김약국의 딸들: 2019.1월의 영화 유현목, 1963

by.홍은미(영화평론가) 2019-01-02조회 9,135
김약국의 딸들 스틸

<김약국의 딸들>(1963)은 유현목의 대표적인 문예영화이자 <오발탄>(1961), <장마>(1979)와 더불어 감독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영화다. 사실 방대한 영토를 지닌 작가의 세계에서, 세목에 따라 주요 작품의 명단은 달라질 것이므로 이러한 열거는 그리 중요치 않을 것이다. 다만 세 작품을 함께 거론한 이유는 각 영화에 따르는 수식어 혹은 위상의 차이 때문이다. (60년대에 문예영화는 대중적인 장르였고, 유현목의 많은 작품들이 소설을 각색해 탄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 영화는 모두 원작이 따로 있는 작품들임에도, 그 사실이 부각되는 정도의 차가 크다. <오발탄>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한국영화사에서도 손꼽히는 수작이며 <장마>는 유현목의 후기 걸작으로 단연 꼽힌다. 반면 <김약국의 딸들>만큼은 걸작이란 수식어가 붙기는 하지만 문예영화로서 더 부각된 경향이 있다. 어쩌면, 그리고 당연하게도 원작의 명성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박경리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김약국의 딸들>에 내재한 비극성은 영화의 필연적인 운명처럼 보인다. 영화는 소설의 몇몇 인물들을 배제하고 서사를 압축하고 있지만, 결말부를 제외하고는 이야기의 큰 줄기가 소설과 다르지는 않다. 한약국을 경영하며 통영의 유지로 성장한 김약국네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이르는 사이 근대화의 물결과 일제의 탄압에 의해 서서히 가세가 기운다. 이에 더해 김약국(김동원)의 네 딸은 제각기의 이유로 풍문과 분란을 일으킨다. 급기야 셋째 딸 용란(최지희)의 외도는 아편쟁이 남편 연학(허장강)의 광기를 폭발시켜 어머니 한실댁(황정순)을 죽음으로 내몰고, 용란 스스로는 충격으로 미쳐버린다.    

김약국의 딸들 스틸
김약국의 딸들 스틸

폐허의 풍경에 예민한 감각을 지닌 감독이, 이 견고한 몰락의 서사를 영화로 만들었으니 비극의 짝패는 둘도 없는 동지 같고, 두 작가가 당대의 현실적인 세목을 펼쳐놓되 비극적인 운명을 연쇄시키며 일으키는 장력은 강렬한 시각적 풍경으로 발현된다. 이를테면 연학이 한실댁을 살해하는 장면은 소설에서 어이없을 정도로 담백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유현목은 이 광기의 현장을 표현주의적 형식으로 시각화하며 영화에서 가장 극렬한 이미지를 표출해낸다. 하지만 이 폭력적이고도 강렬한 이미지를 영화의 주된 매혹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관람자의 안일함을 자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김약국의 딸들>에는 두 가지 풍경이 있다. 하나는 폐허가 되어가는 풍경이고 다른 하나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생동하는 풍경이다. 전자가 영화의 주공간이 되는 김약국의 일가가 사는 집의 풍경이라면 후자는 장소로서의 풍경, 즉 통영의 풍경이다. 집안의 공간이 권위와 관능과 탐욕의 공간으로 상징화되고 때로는 인물들의 육체적인 활동으로 활기를 띠며 대체로 애환과 비탄으로 얼룩져 가고 있다면, 집 외부 그러니까 통영의 장소들은 빈한하지만 소박한 활력이 넘실대는 생명력을 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는 민중들의 활기찬 움직임이 있다. 부둣가와 장터를 물결을 일으키듯 걸어가는 사람들, 신음하는 역사에는 아랑곳도 없이 빛나는 통영의 바다, 그 위로 부지런히 몸을 놀리며 고깃배를 저어 가는 어부들. 유현목은 이 삶의 현장을 부단히 포획해 내며 유동적인 카메라 움직임으로 그들과 함께 흘러간다. 

김약국의 딸들 스틸
 
그렇다고 해서 끈질긴 생명력이 집 외부에만 포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실은 영화의 그 어느 풍경보다도 한실댁의 몸놀림이 가슴을 파고든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계속해서 무언가가 영화를 생동하게 만들고 있는데도 그것의 실체를 언뜻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집안 마당에서 주로 이뤄지는 한실댁의 가사노동이 누군가에게로 이어지면서 그 흐름이 끊기지 않고 있을 때 비로소 그 생동감의 실체가 한실댁의 움직이라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녀는 시집간 딸들의 집까지 누비고 다니며 그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깐 한실댁의 맹목적인 모성은 그녀의 왕성한 활동으로 묘파 되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한실댁은 어느 한순간도 관념적인 존재로 머무르지 않으며 생동하는 요체가 된다.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본능을 발산해내는 용란 또한 가장 솔직한 몸짓의 소유자건만, 영화의 결말부에서 그녀는 처단당하듯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영화의 결말부는 소설과 판이하게 다른 길을 걸으며 살아남은 딸들에게 아버지의 땅으로 복귀하기를 촉구하고 있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오히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당대의 암울한 시대 상황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순응을 요구받은 여성들의 주변적인 지위를 꺼내 들어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얘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깐 <김약국의 딸들>은 생생한 영화적 질감을 다시 음미해 보는 유희로서나 질문을 재인식시키는 작품으로서나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당장 나에게는 한실댁, 아니 황정순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생동감을 조금 더 붙잡고 싶은 마음이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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