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메밀꽃 필 무렵: 12월의 영화 Ⅱ 이성구, 1967

by.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교수) 2018-12-17조회 8,085
메밀 꽃 필 무렵 스틸

이성구 감독의 최고 작품으로 <장군의 수염>(1968)을 꼽는 데 이견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어령 원작, 김승옥 각본이라는 당대 최고 조합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이며,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탈리아의 심리적 리얼리즘의 한국 상륙으로 보일 정도로 세련된 영화적 표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전에, 196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성구 감독에게는 황순원 소설을 영화화한 <일월>(1967)과 이효석 소설을 영화화한 <메밀꽃 필 무렵>(1967)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로써 이성구 감독은 문예영화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감독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메밀 꽃 필 무렵>은 1965년부터 시행된 우수영화 보상정책으로 인해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문예영화 전성기의 한 작품으로 베니스영화제에도 출품되었다. 소설가 이효석이 1936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을 1시간 40분 장편영화로 옮기면서 새로운 캐릭터와 사건들을 추가하였다. 장돌뱅이 허생원, 조선달, 동이 등 세 인물이 나귀를 끌고 봉평장을 오가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 안에 서정적인 문체로 공간과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는 아름다움이 원작의 특징이다. 반면 영화는 허생원의 첫사랑 분이와의 만남을 한 시퀀스로 구성하고, 분이의 떠돌이 생활과 분이를 찾아다니는 허생원의 분투기를 길게 묘사하며, 병으로 골골한 장돌뱅이 윤봉운의 이야기와 조선달의 아내 이야기 등을 삽입함으로써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메밀꽃 스틸
윤봉운(허장강)과 조선달(김희갑)
 
평생을 장터로 떠돌아다니며 지낸 장돌뱅이 허생원(박노식 분)은 조선달(김희갑 분), 윤봉운(허장강 분)과 봉평장에서 다음 장터로 이동하는 중에 젊은 장꾼 동이(이순재 분)를 만난다. 허생원은 주막집 주모와 농담을 나누는 동이가 꼴 보기 싫어 손찌검을 하지만, 애지중지하던 나귀가 끈을 끓고 도망가려는 것을 동이가 잡아오고, 병든 윤봉운의 뒤처리를 해주는 모습에 동이를 다시 보게 된 허생원은 그와 점점 가까워지며 동행한다. 그 와중에 동이도 자신과 같은 왼손잡이임을 알게 되는 허생원이 동이의 홀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제천을 향해 함께 떠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가족 결합을 염원하는 허생원의 로드무비다. 허생원의 외로움은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조선달과 비교되거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늙은 수컷 나귀를 연민 어린 감정으로 돌보는 것에서 잘 표현된다. 하고 또 한 말, 분이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조선달에게 또 늘어놓는 허생원의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이동하기 위한 내레이션으로 활용하면서 그의 과거 로맨스가 플롯 구조 안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톱스타 김지미가 허생원의 첫사랑 분이로 등장함에 따라 그의 극중 비중은 높아졌고, 그의 비극적 사연과 운명은 더욱더 극적으로 플롯화된다. 

메밀꽃필무렵 스틸
분이(김지미)

천하일색인 분이를 장에서 우연히 보고 마음을 빼앗겨버린 허생원은 밤새 뒤척이다 메밀꽃밭에 나가고, 여기서 그는 아버지의 노름빚에 팔려가게 될 분이와 마주친다. 원작에서는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신세 한탄을 하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합방하게 되는 아름다운 사연이지만, 영화에서 허생원은 강압적으로 분이를 범한 후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훗날을 기약한다. 결국 둘은 만나지 못하고 분이와 아들 동이는 이리저리 팔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지금 시대의 눈으로 보면 허용할 수 없는 표현이나, 60년대 멜로 영화가 관음증적 재미를 위해 관행적으로 그리던 겁탈 장면 방식을 노골적으로 사용하여 성적 긴장감을 끌어내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의 치명적 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한국영화니 일부러 배제하고 감상하거나 빼버린 채 영화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이는 사랑을 맹세한 남자가 제시간에 데리러 오지 못해, 원래 계획되었던 아버지의 빚을 탕감하고자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이후 이리저리 되팔려가며 거래 대상이 된다. 이때 그녀의 값어치는 남자들에 의해 반반한 얼굴과 밤자리 실력으로 매겨진다. 철저히 돈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어린 아들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다. 유린당하지만 살아남는 이 여성은 영화에서 원시적이고 신성한 기호로 재위치 된다.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신성함과 메밀꽃으로 기억되는 자연의 원시성을 동시에 가진 이상화된 여성이라는 기호는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60년대 위로부터 강요된 열망이 낳은 일그러진 교섭 장소다. 이는 당대 문예영화의 향토성이 가진 공통감각이기도 하다. 

‘왼손잡이’의 유전성 여부가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는다. 일정한 법칙을 따르지 않는 현대과학의 숙제이긴 하나 대체로 유전되는 경향이 많다고 하니, 허생원이 동이가 왼손잡이임을 알고 반기는 장면은 경험치에서 나온 믿음이다. 이 장면은 허생원과 동이를 더욱 강하게 연결하는 결정적 장치로 기능한다. 

메밀꽃필무렵 스틸
허생원(박노식)과  동이(이순재)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허생원과 동이가, 물어 빠진 허생원을 젊은 동이가 업어주기까지 점점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면서 두 사람의 유대와 연대감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간다. 두 사람의 심정적 변화는 그들의 물리적 위치와 맞물리며 잘 고안된 방식으로 시각화된다. 

이제 정착해야 할 때, 오랜 유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고 싶다는 늙어가는 몸이 전하는 애처로움, 그리고 평생 찾아다닌 숙명의 여인에 대한 애달픈 갈망이 영화 전체에 아우라를 남기는, 처연함과 원시성이 어우러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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