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

by.이상용(영화평론가) 2012-07-19조회 6,234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감독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바보들의 행진>은 1970년대의 대표적인 한국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70년대의 대표작이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붙을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하길종 감독의 활동시기가 1970년대였고(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이 시대에 요절한 감독이다.), 다른 하나는 그 어느 영화보다 197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70년대란 무엇이고, 영화가 이를 어떻게 담고 있다는 것일까. 영화의 주제가 중 하나인 ‘고래사냥’으로 대변되는 송창식의 노래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초반부에 두발단속 때문에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 때문만도 아니다. 1970년대의 청춘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1960년에 만개한 청춘영화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바보들의 행진>은 이전의 청춘영화들이 그리는 정형화된 드라마가 아니라 대학생들의 일상을 보다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길종 감독의 또 다른 영화인 <여자를 찾습니다>의 첫 장면은 이화여대 길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화면에 가깝다. 물론, 영화 전체가 그렇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말이다.) 실제로 <바보들의 행진>은 많은 인물들은 당대의 대학생들이었고, 연극이나 공연을 하던 이들을 캐스팅 하였다. <바보들의 행진>은 먹고 마시는 주변 대학생들의 일상을 담아내려고 한 셈이다. 먹고 마시는 문화가 영화 속에 담긴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대학가라는 분위기를 온전하게 낸 것은 이 영화가 본격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연진뿐만 아니라 30대의 젊은 감독들이 20대를 향해 저항과 체념의 수사학을 펼쳐보인다는 점도 이전의 청춘 영화들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고뇌하는 청춘인 대학생들은 지성의 전당 아래에서 ‘안전’하게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1970년대의 정치적 현실은 각성을 요구했다. 젊은이들은 캠퍼스 아래 안주하는 것을 치욕스럽게 여겼다. 주인공 병태의 친구는 아버지에게 절절 매는 자신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선택하고, 병태는 영자와의 연애가 불투명해지고, 미래도 불투명해지자 군입대를 자원한다. 병태의 군입대는 친구의 자살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또 다른 의미의 자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트 카뮈는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했다. 무덤가에서 데이트를 하는 병태와 영자의 모습은 진지한 철학적 자살을 꿈꾸는 청춘의 진혼곡이며, 이 영화는 젊은이들이 선택한 자기만의 자살을 따라가고 있다. 혹자는 그 모습을 젊음의 어리석음과 나태함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70년대는 치욕을 느끼기는 하여도 탈출을 시도하기에는 너무나 좁은 시대였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치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청춘의 몸부림을 본다. 그것이 바로 스트립쇼이고, 술을 먹다 옆테이블의 사람들과 다투는 이유가 될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치욕의 몸짓과 고뇌가 영화의 검열이라는 문제로 인해 온전히 전달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두 장면을 예로 들고 싶다. 하나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강의실에 앉아있는 병태가 고뇌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고뇌는 검열에 의해 이상하게 편집되었다. 텅 빈 대강의실에 앉아 있는 병태의 모습과 야구대회의 장면이 교차되면서, 병태의 친구들은 야구 경기에 참가한 것처럼 설명이 되고 있다. 이것은 원래의 장면이 아니다. 하길종 감독은 야구 경기 장면이 아니라 대학생들의 데모 장면으로 병태의 치욕을 대비하여 보여주고자 했다. 하지만, 검열에 의해 장면은 대체되고 말았다. 

또 다른 하나는 바닷가 선술집에서 다투는 장면이다. 이 대목에서 느닷없는 싸움이 일어난 탓에 젊은이들의 치기 쯤으로 넘겨버리게 된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한국여성을 매춘하려는 장면을 보고 병태가 나서는 장면이 앞서 포함되어 있었다. 반일감정을 우려한 검열에 의해 이 대목 역시 술취한 젊은이들의 치기로 남게 되었다. 

<바보들의 행진>은 치기가 아니라 치욕을 담고자 했고, 그 치욕을 벗어던지는 성장과정을 담아내고자 했다. 치욕을 벗어나기 위해 이들은 스트립을 행한다며 웃통을 벗고 거리를 질주한다. 스스로 치욕의 대상이라는 것을 커밍 아웃함으로써 그들은 존재의 무게를 비로소 벗어던진다. 젊음이라는 시기는 누가 뭐래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만끽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시대의 무거움은 그들의 발걸음을 매번 무겁게 만들고, 젊은이들을 취하게 만든다. 이 역설의 상황이야말로 하길종의 카메라가 가닿은 지점이었다. 그리하여,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을 그린 이 영화를, 1970년대를 넘어서 한국영화사의 대표적인 청춘영화로 언제나 떠올리게 만든다. 

P.S. 이 영화는 형식적으로도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했다. 존 부어맨을 비롯한 1970년대의 유명한 영화들을 보면 막 개발된 ‘줌’의 활용을 볼 수가 있다. 한국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줌을 사용하고, 활용한 작품이 바로 <바보들의 행진>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1970년대라는 독특한 테크닉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세계영화사의 예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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