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중은 나쁜 형사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마약상에게 마약을 빼앗느라 부어오른 강철중의 얼굴이 보이고, 부패 혐의로 내사를 받던 파트너는 권총으로 자살한다. <
마이 뉴 파트너>를 인용한 <
투 캅스>의 캐릭터와도 비슷하지만 이건 개과천선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의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만 <
더티 해리>의 캘러핸 형사도 아니다.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받아 경사로 특채된 권투 선수 출신의 강철중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직감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야수 같은 존재다. 그가 속한 경찰 조직은 단지 그에게 무기를 쥐여주는 수단일 뿐, 경찰의 ‘의무와 책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악당들에게 적당히 돈을 뜯고, 보통 사람들에게 적당히 뇌물도 받아가며 살아간다.
그런데 시대가 걸린다. 제목을 따온 할리우드 영화 <
공공의 적 Public Enemy>의 악당은 자본주의 구조의 이면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워 가는 갱스터였지만,
강우석이 지목하는 21세기 벽두의 ‘공공의 적’은 다국적 금융자본의 첨병으로 한국사회, 경제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펀드 매니저다. 강우석의 <공공의 적>이 개봉한 것은, 2002년 월드컵으로 한국이 들썩이기 직전인 1월이었다. 1997년 IMF 사태로 한국사회가 요동치고, 취업과 고용을 비롯한 모든 것이 불안정해졌다. 2001년에는 9.11. 테러로 세상의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21세기는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언제 어디서건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극도의 위험사회였다. 그리고 그 불안과 두려움을 이용하여 열심히 돈을 벌어들이는 누군가가 있었다.
강우석은 언제나 ‘먹물’들을 싫어했다. 잘난 척하는 지배계급, 고위관료와 지식인들을 혐오했다. 강우석은 1997년에 <
주유소 습격사건>을 제작했다. 무정부주의적인 소란과 반항. 어디에도 돌파구는 보이지 않고,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장식하기는 힘들었지만 날것의 분노가 있었다. 들끓는 에너지를 감지하는 힘이 당시의 강우석에게는 있었다. <
공공의 적>에서 강우석은,
이성재가 연기한 조규환을 ‘공공의 적’으로 지목한다. 승승장구하던 펀드 매니저 조경환은 철저한 자본주의형 인간이다. 위기에 몰린 회사를 냉정하게 부도 처리하여 사장을 자살로 내몰고, 자신을 화나게 한 택시기사는 벽돌로 때려죽인다. 한 달만 기다리면 수백억 원으로 불어날 투자금을, 철거 위기에 몰린 고아원을 돕겠다며 빼 오라는 아버지를 조규환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조규환은 태연하게 부모를 죽인다.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잔인하게 내쳐버린다. 부모를 죽인 날 밤, 강철중을 만나기 전까지는.
조규환은 누가 봐도 악인이다. 그런 인간을 처단, 응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강우석은 반대편에 강철중을 놓는다. 강철중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도덕적 인간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의지도 없다. 강철중은 세상이 악의 구렁텅이이고, 자신도 그 틈에서 얼렁뚱땅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강우석은, 그런 정도는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조규환은 강철중의 악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악을 행하는 인간이다. 적당한 악인인 강철중은 비로소 ‘공공의 적’을 보게 된다. 아벨 페라라의 <
나쁜 경찰>에서의 형사는 수녀를 강간하고 강도질을 하는 범인들을 추적하며, 그들이 단지 세상의 악에 물들어버린 평범한 소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좌절에 빠지고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악인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거나, 스스로 파멸해 버리는 것은 일반적인 공식이다.
하지만 강철중은 단순한 인간이다. 조규환의 악행을 알고, 강철중은 술집에서 후배 형사에게 말한다. 인간이,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돈 좀 뺏을 수도 있고, 몇 대 팰 수는 있지만, 조규환처럼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세상이 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조규환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어떤 역할인지 그런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 말해도 모른다. 부모를 죽인 냉혈한과의 싸움이라는 소재는 코미디보다는 서늘한 누아르에 적합해 보이지만
강우석은 <
마누라 죽이기>처럼 스릴러에 어울릴법한 소재를, 코미디로 능청맞게 뽑아내는 솜씨가 있다. <
공공의 적>은 권력과 시스템 자체에 진지하고 날 선 비판을 가하지는 않는다. 그냥 강철중처럼 치받아버린다. 강철중은 편의에 따라 증거를 조작하고, 시스템을 조롱한다. 그건 시스템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엿 먹어라’ 외치고는 도망쳐버리는 것이다.
강철중은 ‘공공의 적’,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자들을 응징한다. ‘사회 질서 수호’ 같은 데에는 추호의 관심도 없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자들만 골라내서 반 죽여 버린다. ‘공공의 적’을 발견한 강철중은 이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엘리트’를 무참하게 박살 낸다. 결코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주먹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지만 그 통쾌함과 후련함으로 <
공공의 적>은 관객을 흥분시킨다. 즐겁게 만든다. 그게 상업영화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