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써니 강형철, 2011

by.유지나(영화평론가) 2014-07-07조회 3,713
써니

힘겨운 일상을 보내는 중년 여성들의 지친 삶과 발랄하고 분방한 소녀들의 삶이 교차되는 <써니>를 보노라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문정희 시인의 질문에 <써니>는 웃음과 눈물겨운 전복적 답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이 품고 가는 80년대 대중음악과 춤을 타고 넘치는 에너지는 복고열풍과 더불어 관객의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전작인 <과속스캔들>에서 가족을 둘러싼 코믹정신을 폭발시켜 낸 강형철 감독의 연출 에너지는 <써니>로 시대결합과 세대전복을 유쾌하게 달성해낸다. 

제3의 인류처럼 ‘아줌마’로 불리는 여자들. 그러나 그녀들도 한때 꿈을 가졌던 소녀들이었다. 25년을 간격으로 두고 과거 소녀와 중년 여성을 오가는 서사는 우정의 힘으로 부활하는 자신의 얼굴을 가진 여성들의 새로운 인생 만들기와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나미(유호정)는 무덤덤한 가족관계 속에 시들어가던 전업주부이다. 그런 나미가 어머니 문병 차 들린 병원에서 고교 시절 친구 춘화(진희경)를 만나면서 인생이 다시 시작된다. 병실 벽에 기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를 부르며 이루어지는 이 둘의 재회가 친구 찾기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시한부 환자인 춘화가 ‘죽기 전 친구를 보고 싶다’는 유언이 미리 집행되는 셈이다. 그녀들은 그 때 그 시절, 학교를 주름잡던 불량서클 ‘7공주파 써니’였고, 춘화(강소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멋들어진 대장이자, 벌교에서 전학 온 나미(심은경)가 왕따당하기 직전 챙겨준 왕언니이기도 했으니까. 

수업 중에도 쌍꺼풀 만들기에 매진했던 장미(김민영, 고수희)는 영업실적에 시달리는 보험설계사. 입에 욕을 물고 살던 진희(박진주, 홍진희)는 성형과 내숭 기술로 사모님으로 변신했다. 문학소녀 금옥(남보라, 이연경)은 시집살이에 지친 눈치보기 주부가 되었고 미스코리아를 꿈꾸던 복희(김보미, 김선경)는 남루한 술집 여자로, 약자 중의 약자로 전락해버렸다. 냉정한 얼음공주 수지(민효린)는 찾아내기도 힘들지만 그녀가 냉랭했던 이유도 서사가 진행되며 점차 드러난다. 

영화보기의 재미는 불량서클 소녀들의 일상과 80년대 문화풍경이다. 음악다방, 기차여행과 민주화 거리투쟁 재현이 거기에 얹혀진다. 또 다른 불량써클 ‘소녀시대’와 ‘써니’가 맞장뜨는 장면은 ‘청년 대 전경’과 몽타주되어 80년대 거리 자체를 ‘터치 바이 터치 Touch by Touch’ 음악으로 풀어낸다. 일상과 사회상의 오버랩, 음악과 이미지의 공감각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80년대 장안을 풍미한 음악들, 나미의 ‘빙글빙글’, 영화제목이기도 한 보니 엠의 ‘써니’가 폭발력을 과시하며 우정의 힘을 25년 만에 회복시킨다. 결말 씨퀀스에서 상복을 벗어 던지며 시작되는 춘화가 원했던 ‘춤추고 노래하는 연대의 힘’은 아이러니의 묘미를 선사한다. “써니, 예전 내 인생엔 비가 내렸지. 써니, 네가 미소 짓자 고통이 지워졌지. 이제 어두운 날들은 가고, 밝은 날들이 왔어.” 노랫말처럼 옛 친구와의 우정 회복은 망가진 인생, 나 아닌 누군가의 부속물로 살아가는 것이 여자의 운명이라 감수하며 시들어가던 중년 여성들의 삶에 자기 뜻대로 살아보는 제2의 인생을 예고하는 죽음과 삶의 파티이다. 한국영화에서 매우 드물게 여성의 생동감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펼치게 된 덕인지, 진희경, 김장미 등등... 모든 배우가 멋지다. 그들의 십 대 시절 역을 맡은 소녀배우들도 멋지다! 인물의 이름들은 그 시절 가수들과 일치한다. 나미, (하)춘화, (윤)복희 등등. 마치 그녀들을 추억하며 기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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