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꽃잎 장선우, 1996

by.김성욱(영화평론가) 2014-05-16조회 6,251
꽃잎

해마다 5월이 오면 어쩔 수 없이 장선우의 <꽃잎>을 떠올린다.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세 번 보았다. 개봉하던 1996년에, 그리고 십 년만인 2006년에 1996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특별전에서, 그리고 2010년에 열린 ‘장선우 특별전’에서 다시 보았다. 그 때 이 영화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지만 여전히 이 영화를 말하기가 조심스럽고 어렵다. 영화 마지막의 ‘우리들’에게의 부탁과 마주하면 망연자실해진다. “혹시 찢어지고 때 묻은 치마폭 사이로 맨살이 행여 당신의 눈에 띄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 주십시오. 당신의 옷자락이나 팔꿈치를 잡아 당겨도 부드럽게 떼어 놓아 주십시오. 어느 날 그녀가 쫓아오거든 그녀를 무서워하지도 말고, 위협하는 말도 던지지 마십시오. 그저 관심 있게 보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영화는 우리들에게 소녀를 보아주기를 부탁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니 그 소녀를 보는 우리들은 누구일까? 나는 이런 질문과 관련해 지극히 제한적으로 <꽃잎>에서의 ‘우리들’과 ‘보기’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싶다. 광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전히 내겐 어렵기 때문이다. 

<꽃잎>의 서두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조금 전에 광주학살의 다큐멘터리 화면을 보았고(이 화면들은 오랫동안 공식으로는 보여 질 수 없었던 금지된 영상이었다), 극영화의 한 장면으로 한 소녀가 행복한 한 때를 보내던 순간과 마주했다. 이름도 없고 단지 ‘우리들’이라고 표현되는 그들은 그 소녀를 찾고 있는 중이다. 나중에 우리는 그 소녀가 5월 광주 금남로의 학살의 때에 살아남아 떠도는 생존자임을 알게 된다. 네 명의 남녀인 ''우리들''은 기차를 타고 그녀를 찾아 이동 중에 있는데(나는 이 영화에서 기차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은데, 가령 영화 후반에 소녀가 기차를 타고 가다 자신의 유령과 마주하는 순간들을 포함해서. 하지만 지금은 이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뒤로 미루고 싶다) 그들은 각자 지도를 보고, 소주를 마시고, 쪽지를 읽고 있다. 그 중 한 명이 영화의 화자이다(설경구가 그 역할로 등장한다). 오프닝의 마지막은 그런 ‘우리들’중의 한 명이 지도를 보다가 건너편의 자리에서 남녀가 몸을 만지는 것을 몰래 힐긋 훔쳐보는 장면이다. 전경에는 지도를 보며 오징어를 씹고 있는 남자가, 후경에는 애정표현을 하는 두 남녀가 보인다. 

영화의 오프닝을 이런 식으로 보여주는 작가가 얼마나 있을까? 게다가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을 다룬 영화의 서두를 이렇게 표현하는 작가란 드물 것이다. 그만큼 서두의 이 장면은 영화 시작부의 학살 이미지만큼이나 강렬한 기억으로 내게 남았다. 생각해보면 장선우의 영화는 그런 식의 장면을 즐겼던 것처럼 보인다. 가령,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한 장면에서는 소설가로 나오는 남자가 여자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문학에 대해 고상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 카메라의 시선은 여자의 벌려진 다리를 향한다. 이는 관객의 보기를 시험하는 도전적인 장면처럼 보인다. 우리는 카메라의 시선이 향해있는 여자의 다리를 봐야 하는지 혹은 둘의 대화를 들어야만 하는지 잠시 망설이게 된다. 개봉 버전에는 삭제되어있는 <거짓말>의 시작 부분에는 주인공 여자가 기차를 타고 남자를 만나러 가며 음란한 이야기를 하는(나쁜 의미의 표현이 아니다) 장면이 있다. 이 때 카메라는 이야기하는 여자와 옆자리의 한 중년의 남자를 함께 보여준다. 픽션의 이야기이지만 형식상으로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카메라의 이런 보여주기 방식은 두 사람이 한 화면에 있으면서도 정작 이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 있거나, 서로 다른 세계가 뒤섞여 있다는 혼란스런 느낌을 준다. 표준적인 우리들 관객은 극영화에서 카메라가 보여주는 세계를 픽션의 세계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러하다. 물론 이는 연극과는 다른 극영화의 일종의 거짓된 약속의 세계이다. 여자의 말이 픽션의 이야기 세계를 구성한다면 그녀를 포함해 카메라가 보여주는 배경적 세계, 즉 기차 안의 사람들의 모습은 그런 이야기 세계의 거짓된 약속의 바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카메라가 인물과 픽션의 테두리를 초과해 보여주는 이런 보기의 방식, 즉 편의상 ‘참여적인 카메라’ 혹은 ‘자유간접화법의 카메라’(짐작하듯이 이 표현은 파솔리니의 용어를 빌린 것이다)가 장선우 영화의 특별함이라 생각한다. 장선우는 그런 보기의 방식을 일찌감치 ‘카메라의 인간선언’이라는 글에서 말했던 적이 있다. 그는 카메라가 ‘보여준다’는 표현 대신 카메라가 ‘본다’고 말했었다. 카메라가 보여준다는 것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기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본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전자에서는 카메라가 기계이지만 후자에서는 하나의 생물로 존재하여 함께 참여한다. 쉽게 말하자면 그가 처음에 몰두했던 마당극의 참여적인 특성을 떠올릴 수 있다. 장선우가 말한 마당극의 무대란 서구식의 연극무대와 달리 인물들이 공간적 구분이 없는 상태 안에 함께 위치하게 되는 특성을 지녔다. 극의 닫힌 이야기 세계는 바깥으로 열려있고, 관객 또한 극의 테두리가 불분명한 열린 세계에서 단지 보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에 참여하는 경험을 맛본다.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그런 이야기 세계의 테두리를 넘어 열려있을 때 우리는 참여적인 보기에 도달한다. 이는 인물의 심리와 이야기 세계와는 무관한 카메라의 무감한 시선 때문에 맛보는 세계의 경험이다. 나는 홍상수 영화에서의 줌이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세계에 입회해 우리와 세계의 관계를 얻는다. 그것은 단지 본다는 것만이 아닌 윤리적인 참여의 방식이기도 하다. 

<꽃잎>에서 소녀를 찾는 ‘우리들’의 돌아다님은 느슨한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소녀의 떠돌아다님은 긴급함을 느끼게 한다. 이 두 세계는 평행하고 ‘우리들’의 로드무비는 여기서 실패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뒤늦게 도착한다. 찾을 수 없는 소녀. 확인될 수 없는 이야기. 여전히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이 영화를 말하는 것도 글을 쓰는 일도 쉬운 게 아니다. 여전히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고, 어렵다. 위험에 처한 이들을 구제할 생각이 없는 정부를 보았던 잔인한 4월이었으니.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우리는 야수 같은 정부가 존재했던 5월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5월의 소녀를 여전히 찾고 있을까? 영화 속 ‘우리들’이 멈춘 그 지점에서 최소한 우리들은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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