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막차로 온 손님들 유현목, 1967

by. 2013-11-13조회 3,129
막차로 온 손님들

유현목의 <막차로 온 손님들>은 [주간 한국]에 연재된 홍성원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박정희 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료된 다음 해인 1967년에 발표된 이 영화는 급격한 근대화와 산업화의 그늘을 그리고 있다.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면서, ‘배금주의’가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구조화된 불평등과 빈부격차로 인한 박탈감은 절망적이고 자학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4·19 혁명에서 꿈꾸었던 민주주의는 점점 멀어지고, 시민들은 일상적인 자유를 억압하는 야간 통행금지에 쫓겨 서둘러 ‘막차’를 타야 했다. 낙엽이 흩날리는 을씨년스러운 밤거리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196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표정을 우울하게 조명하고 있다. 

이 어둡고 음울한 도시에서,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돈’이다. 주인공 동민은 은행에 다니다가 주판과 숫자놀음에 질려 그만두었다. 그는 ‘은행원은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고 말한다. 그는 번역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려고 했지만, 폐장육종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다. 동민의 친구 충현은 가난을 벗어나려고 일본의 아버지를 찾아가 거액을 마련해온다. 아내와 행복하게 살려던 그의 꿈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면서 깨져버린다. 두 사람의 친구인 경석은 의사인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미망인 세정의 구애를 받고 있다. 경석은 세정에게 호감을 갖게 되지만, 세정의 재산을 탐내는 주변 사람들의 광기에 환멸을 느낀다. 

세상에서 실패한 그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타락해간다. 동민은 매일 폭음을 하며 삶을 연장할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충현은 화가가 되겠다면서 아내를 닮은 인숙을 모델로 고용한 다음 가학적으로 다룬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만다. 경석과 세정의 결혼식은 돈에 굶주린 하객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어버린다. 경석은 세정을 버리고 혼자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아수라장으로 변한 결혼피로연 장면은 돈 때문에 망가져 가는 한국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곳에서 인물들은 깊은 상실감에 빠진 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다. 충현은 음독자살을 시도하고, 동민과 경석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대로 방치한다. 그들은 친구지간이면서도 시종일관 서로에게 냉소를 보내며 비아냥거린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고뇌 속에 갇힌 채 사랑을 고백하는 여성들에게조차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여성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고 하는 데 비해, 남성인물들은 수동적인 태도로 무기력하게 물러서거나 가학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삶의 권태와 피로, 낙오했다는 느낌과 무언가를 잃어버린 상실감 속에서 붕괴해간다. 여기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균열의 조짐을 보이는 가부장제와 이에 대한 남성성의 위기의 징후가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막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동민은 기다리던 세정과 포옹함으로써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는 신호등처럼, 영화는 애써 희망의 실마리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충현은 택시에서 시체로 발견될 것이고, 동민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막차로 온 손님들>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이만희의 <만추>나 김수용의 <안개>처럼, 근대화의 피로를 다룬 모더니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 곳곳에는 1960년대 말부터 유행한 신파영화의 조짐이 보인다. 여성인물들은 모두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터뜨리고, 배우들의 연기는 신파 무대에서처럼 한껏 과장되어 있다. <미워도 다시한번>(1968)으로 대표되는 신파영화의 흥행은 한국사회의 퇴행을 보여주는 증후였다. 

유현목은 이 영화 다음에 근대화를 매우 긍정적으로 그린 <수학여행>(1969)을 찍었다. 황순원 원작의 <카인의 후예>(1968)를 시작으로 실향민이면서도 손대지 않았던 반공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영화의 후퇴와 신파영화의 득세 속에서, 흥행영화 감독이 되거나 반공영화(또는 문예영화) 감독으로 생존하거나, 답이 없는 선택지를 받아야 했던 유현목은 은행원과 번역가의 삶 모두에서 패배한 동민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을 것 같다. 그 인물이 세상을 냉소하며 죽음에 강박적으로 이끌릴 때, 거기서 유현목의 깊은 고뇌를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유현목의 1960년대 마지막 모더니즘 영화인 <막차로 온 손님들>은 더욱 의미심장한 작품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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