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지슬 - 끝나지않은 세월2 오멸, 2012

by.남동철(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2013-05-22조회 4,887
지슬 - 끝나지않은 세월2

<지슬>은 2013년 한국영화를 논하는 자리에서 가장 먼저 언급될 영화이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라는 점, 제주도에서 제주 방언을 써서 찍은 제주 영화라는 점, 독립영화로서 대성공이라 할만한 흥행성적을 거뒀다는 점,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는 점 등 여러 화제를 낳았지만 <지슬>의 영화적 성취는 위와 같은 영화 외적 화제를 능가하는 것이다. <지슬>은 역사와 신화, 현실과 비현실, 희극과 비극이 기적적인 조화를 이루는 영화다.

우선 <지슬>은 4·3사건으로 희생된 이를 기리는 제사의 기능을 하고자 한다. 신위, 신묘, 음복, 소지로 이뤄진 4개의 장은 영화의 제의적 성격을 직접 지시한다. 그러나 각 장이 특별히 제사의 절차에 해당하는 드라마를 제공하는 건 아니다. 혼을 불러내어 그들의 사연을 들어보는 장면은 후반부에 집중된다. 동굴 속 어둠 속에 인물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꿈결처럼 이어지는 장면과 죽은 자들의 옆에 그들의 이름이 적힌 지방이 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를 일종의 위령제로 마감하는 것이지만 <지슬>에서 엄숙함을 강요하는 장면은 예외적으로만 드러난다. 이 영화가 희생자를 불러내는 방식은 그들의 절망적 상황 이전에 그들의 소소한 삶에 초점을 맞춘다. 당시 정치적 상황을 잘 몰랐던 순박한 마을 주민들은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쓸데없는 일에 집중하고 사소한 걸림돌에 시간을 지체한다. 그들이 나누는 믿을 수 없이 한가로운 대화는 상황의 엄중함과 대비를 이뤄 키득키득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마을 주민의 어수룩한 모습과 대비를 이루는 것은 토벌대의 무시무시함이다. 영화의 첫 장면, 뿌연 연기가 걷히고 카메라가 흩어진 제기를 따라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장롱에 시체인 듯한 여자의 몸이 보인다. 두 군인이 시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먹는데 영화는 화면이 바뀐 상태에서도 배를 쩝쩝 씹는 소리를 증폭해서 들려준다. 인과관계가 설명되지 않은 채 알몸인 여자의 시체와 두 군인이 나오는 첫 장면은 당대의 상황을 한눈에 드러낸다. 이것은 납득될 만한 상황이 아니라 그냥 이미 일어나버린 참극이다. 살인이 일상인 세상에서 그들은 여자의 몸을 찌른 그 칼로 과일을 잘라 먹고 있다. 화면에 칼로 여자를 찌르는 장면이 나오진 않았지만 배를 씹는 소리만으로 관객은 충분히 몸서리치게 된다. <지슬>에 나오는 살인에 미친 군인은 이처럼 어느 공포영화의 괴물보다 무시무시하다. 그들은 토벌을 위해 출동하는 군인들에게 “기집애도 하나 잡아와라.”라고 외치는 인물 혹은 빨갱이가 너무 싫어, 어머니 같은 시골 할머니를 죽이는 인물이다. 관념 속의 악마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했던 악마를 이 영화는 너무도 생생히 그려내고 있다. 

군인과 주민의 강렬한 대비는 공포와 웃음의 이중주로 이어진다. <지슬>은 살벌한 장면과 코믹한 장면이 교차하는 독특한 리듬의 영화다. 그것은 ‘역사란 비극이자 희극’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엄숙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당대를 희화화하는 것일지 몰라도 <지슬>에서 희극의 효과는 오히려 당대를 객관화하는 것이다. 책에 적힌 비극의 한계를 벗어나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관객을 웃기고 울리면서 당대를 체험하게 한다. 말다리라 총 가진 군인도 자기를 못 잡을 거라 믿던 청년, 가족이 없어 돼지 하나만 의지하고 살던 아저씨, 남몰래 순덕이를 사랑하던 사내 등 각자의 개성은 뚜렷하다. 그리하여 <지슬>은 그런 지옥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우리 이웃임을 불현듯 상기시켜준다. 불에 타 죽은 어머니가 남긴 감자를 갖고 동굴로 돌아온 아들은 마을 사람들과 감자를 나눠 먹는다. “지슬이 참 돈다. 돌아(감자가 참 달다)”는 아이러니한 대사가 비극과 희극을 뛰어넘는 감정의 절정을 만들어낸다.

<지슬>에서 감자와 더불어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은 군인들의 거주지 앞마당에 놓인 솥이다. 돼지를 삶던 그 솥에 살인마를 집어넣음으로써 이 영화는 진짜로 무시무시해진다. 물 항아리를 짊어지던 젊은 군인 정길이가 말한다. “이젠 그만 죽이세요.” 간절한 바람은 <지슬>의 위령제를 무당이 혼령에게 제물을 바치는 속죄의 제의로 변화시킨다. 그렇다. 정길은 신화에서, 비현실에서, 저승에서 온 무당이다. <지슬>은 정말 귀신 들린 영화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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