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
복수는 나의 것>은 소화가 잘 안 되는 영화다.
김지운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한 번에 소화하기 힘들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두 번 보고 세 번 보아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관람 후 겪게 되는 그 체증의 이유가, 이 영화의 서사적 논리가 너무 복잡하고 애매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단순하고 명증되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 그려내는 세계는, 단순하고 명증된 ‘인과율’의 세계다. 단, 그 인과율은, 근대 리얼리즘의 심리적 인과율이 아니라, 보다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형이상학적인 인과율이다. 이 영화의 서사적 토대를 이루고 있는 ‘복수의 논리’는, 근대적인 법치주의의 그것이 아니라, 법 이전의 법(또는 법의 인류학적 원형)의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인과율의 더 정확한 이름은, “눈에는 눈, 귀에는 귀”라는 ‘응보의 논리’다. 장기밀매업자에게 신장을 빼앗긴 류(
신하균)는 그들의 신장을 빼앗아 먹는 것으로 복수하고, 동진(
송강호)은 익사한 후 부검 되어 화장된 딸의 복수를 위해서 류를 익사시킨 후 토막을 낸 후 그 일부(옷)를 불에 태우려고 한다(류의 토막난 시체가 담긴 자루들 옆에 놓인 석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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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의 후반부는, 철저하게 원초적인 응보의 논리를 따라 제의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는 류와 동진의 복수 행위를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달리 말하면, 서사적 개연성 또는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한 정보는 생략되거나 무시되어 있다. 동진이 어떻게 류의 피난처를 알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보의 부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일견 단순하고 명증된 듯 보이는 그 인류학적 차원의 복수의 논리에는, 미묘한 불균형 또는 비대칭이 존재한다. 신장 하나를 잃은 류는 장기밀매업자 가족 세 명의 신장을 취하고, 동진은 류가 자신의 딸에게 가한 적이 없는 가해(발목의 상처) 행위를 추가로 행한다. 류가 행한 부등가교환은 동진의 행위로 처벌되지만, 동진이 행한 부등가교환은 누구에 의해 처벌되는가? 바로 여기에 영미(
배두나)가 경고했지만 아무도(또는, 체제가) 믿지 않았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 등장해야 하는 필연성이 있다. 류와 동진의 과잉 행위는 누나-여자와 딸-여자에 대한 원초적인 상실감이라는 인류학적 차원의 논리에 따른 것이지만, 그 복수의 순환을 완결 짓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행위는 계급투쟁이라는 사회학적 차원의 논리에 따르고 있다. 바로 이것이 <복수는 나의 것>을 ‘문제적 텍스트(또는, 소화하기 어려운 영화)’로 만들고 있다.
많은 평자들이 이미 지적한 것처럼 영화의 제목인 <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나’는 바로 ‘복수 그 자체’이다. 또는, 영화의 영어 제목(
Sympathy for Mr. Vengeance)에 나타나는 인격화된 ‘복수라는 개념’이다. 류와 동진은 바로 그 ‘복수 씨’의 ‘꼭두각시’이다. 문제는 그 ‘마리오네트’의 정체성이 분열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류는 자신의 누나를 잃은 동생-남자이자 가난한 ‘근로자’이고, 동진은 자신의 딸을 잃은 아빠-남자이자 ‘기업가’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서사적 토대라 할 원초적 응보의 논리를 앞뒤에서 감싸고 있는 것은 근대적인 계급투쟁의 논리다. 물론, 영미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은, 그 이질적인 논리를 연결(또는 응축)시키기 위해 그 자리에 놓인 알리바이(또는 잉여)다. 문제는 그 영화적 잉여를 정치적, 또는 미학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씨네필 감독의 고약한 정치적 유희(또는 냉소)인가? 아니면, 시대의 징후에 대한 예민한 정치적 진단인가? 이 영화가 가져다주는 체증은 이 ‘내기’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 힘들게 만든다는 데 있다. 거의 10년 만에, 오래 묵은 체증을 풀어보기 위해 다시 본 후, 나는 후자 쪽에 내기를 걸기로 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이 영화가 IMF 이후 급물살을 탄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대한 진심 어린 질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머리를 두 개 가진 호주 남자가 두통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쏘아버렸다는 영미의 이야기에 그가 쏜 것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묻는 류). 둘째는, 이 영화가 그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대한 어떤 저항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저항은, 영미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라는 일종의 정치적 ‘유령’을 동원해서만 가능한, 영화적 저항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유령은 불과 십여 년 전으로부터 돌아온 아주 가까운 존재이기도 하다. 동진은 정확히 자신이 행한 것을 되돌려받는 방식으로 죽는다. 그는 자신이 류의 발목에 낸 상처를 손바닥으로 되돌려 받고(또는, 류가 입은 옆구리 상처를 덤으로 받고), 자신이 거리를 두고 목격했던 팽기사의 행위(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죽는다. 그 마지막 행위에는 또 다른 차원의 응보율이 있다. 자신이 고문을 가했던 영미 역시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죽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은 <박하사탕>의 영호의 또 다른 변주이기도 하다. 노동자였던 영호가 고문경찰에서 실패한 사업가로 변신하고 있다면, 동진은 기술자로 시작해서 기업가로 성공한 후 실패를 맛보고 나서 고문경찰이 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영미에 대한 그의 고문행위는 일종의 성고문이자 전기고문, 즉 80년대 고문경찰 행위의 응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 추신(또는, 사족) : 내용의 차원에서 인류학적(또는, 형이상학적) 응보의 논리와 사회학적 계급투쟁의 논리를 응축하고 있는 이 영화는, 형식의 차원에서도 근대적 리얼리즘과 반-리얼리즘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가령, 영화는 충분한 심리적 동기와 복선을 담고 있지만, 그 동기가 관객의 심리 속에서 충분히 자리 잡도록 하는 근대적인 수사법을 따르지 않는다. 아니, 그 감정적 숙성의 과정을 철저하게 생략한 채, 원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복수의 논리를, 그것도 가속적인 방식으로 전개해 나간다). 이 아슬아슬한 경계가 소화불량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국영화의 전통 안에서 드물게 보는 미학적인 성취이기도 하다. 그 줄타기, ‘낙관적인 관객(또는 평자)’라면,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성취라는 쪽에 내기를 걸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