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다. 18년이나 한국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자가 여자를 끼고 놀던 저녁 술판, 그것도 자신의 최측근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정치적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신독재는 더욱 잔인한 군사독재로 이어졌고, 암울한 시대는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신화로 기억하길 바랐다. 그로부터 2005년,
임상수가 처음으로 이 사건을 영화화했다. 26년 만의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개봉도 하기 전부터 논쟁에 휘말렸다. 보수언론은 이 영화를 보기도 전부터 역사적 불경과 왜곡을 부르짖었고, 박지만은 이 영화에 명예훼손 등의 문제를 걸어 법정싸움으로 몰아갔다. 결과는 영화의 시작과 끝 부분에 삽입된 다큐멘터리 영상 4분여를 삭제하라는 법원 명령으로 이어졌다. 결국 영화는 훼손된 채 대중과 만나게 되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영화계에는 표현의 자유 논쟁이 벌어졌으며, 또한 영화와 실재가 맺는 관계성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상한 것은 이 영화가 개봉된 다음에 벌어졌다. 이 영화는 좌파와 우파,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보수언론을 내세운 우파들은 이 영화에 대해 살의에 가까운 적개심을 내보였고, 진보주의적인 관점을 가진 평자들 상당수도 이 영화의 역사관에 대해 불편해했다. 이 불편함의 한 가운데는 승자와 패자를 막론하는 역사적 엄숙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이 영화는 왜 그때 도착했으며,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고증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날 그들이 죽었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것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아니라, 그것을 철저하게 몰아내는 엑소시즘으로서의 영화이다. 박정희는 죽은 자이고 유령이다. <
그때 그 사람들>은 그 유령의 절대적 죽음을 재촉한다. 이를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슬라보예 지젝의 ‘두 번의 죽음’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라캉에게서 가져온 이 개념은 존재의 죽음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물리적 죽음으로 이것은 유한한 인간 육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상징적 죽음으로 상징계(Symbolic) 내에서 의미가 소멸하거나 부정되는 순간인 것이다. 물리적 소멸과 상징적 종말이 이루어졌을 때야 비로소 절대적 죽음이라는 개념에 다다른다. 슬라보예 지젝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여기, 첫 번째 죽음이 발생한 이후, 두 번째 죽음까지의 차이 공간이다. 두 개의 죽음 사이에서 죽은 자를 둘러싼 산 자들의 환상이 결합되기 때문이다. 이 환상 속에서 죽은 자는 성자가 되기도 하고 괴물이 되기도 한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박정희를 떠올려야 한다. 그는 1979년 10월 26일 살해당했다. 그날 그때 물리적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사회의 상징계에서 그는 여전히 성스러운 존재이다. 박정희 신화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경제적 위기는 가부장제와 남성성에 대한 위기로부터 부활하였다. 우파와 대중의 환상이 그를 신화로 불러낸 것이다. 현실에 대한 우울은 과거의 영광스러운 시대(오인된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했고, 박근혜가 정치적 실세로 등장하였다.
임상수의 <
그때 그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시기에 도착한 영화였다. 경제악화와 함께 노골화된 박정희 신드롬의 절정 속에서, 임상수는 영화를 통해 박정희를 다시 한번 살해한다. 그러나 영화적 소환과 살인은 실제 살인처럼 현실에서 격렬하게 부딪쳤고 법정으로 비화되었다. 조선일보의 리뷰는 그러한 반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0·26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미친놈들의 미친 짓’이라 말하는 건 지식인적 니힐리즘이 아니라, 무책임과 회피다. 이 맹목적 시니컬리즘은 나름의 존재적 이유로 충만했던 박정희와 김재규라는 두 인물의 진심을 어느 쪽도 설명하지 못한 채 그저 역사를 모독할 뿐이다. 이런 금기의 소재를 미진한 블랙코미디로 낭비해버린 건, 영화역사에 대한 실례다. 이 영화의 최대 악덕은 민감한 내용을 강하게 다뤘다는 게 아니라, 역사를 버릇없고 무책임하게 다뤘다는 점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영화에 대한 불편함은 비단 보수언론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이 영화는 당시 거의 아무에게도 지지받지 못하였다. 한국의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기에 이 영화는 하루 동안의 정치적 스캔들만 존재할 뿐 원인과 결과가 사라진 영화이다. 사건은 묘사되지만 역사적 해석과 입장은 배제된 것처럼 보인다. 감정이입과 동일시를 배제하는 카메라 워크는 관객들의 심리적 정박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영화는 스스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관객 대다수가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통념들을 부정한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
그때 그 사람들>은 정말이지
임상수의 영화가 아니라 박정희의 영화가 되었고, 임상수는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역사가가 되어 버렸다.
허문영은 <
그때 그 사람들> 개봉 당시, 이 영화를 풍속화에 비유했다. 이것은 적절해 보인다. 풍속화라는 개념은 비천하고 남루한 서민들의 일상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묘사였다. 10.26 사건은 위에 인용한 보수지 기자가 썼듯이 금기의 사건이었고 성스러운 영역이었다. 누구나 알고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알고 있는 것은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보수 언론이 운운하는 그들의 진심, 존재론적 정당성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이 풍속화로 비쳤다면, 그것은 그 살 떨리는 순간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평범하고 비천한 욕망과 공포가, 마치 성상을 덮고 있던 검은 천(제의적 기능)을 벗겨 내듯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에 대한 불경’, 심지어 ‘영화역사에 대한 실례’라고 주장하는 자 역시, 그날의 역사가 어떠했으며, 실은 역사란 무엇인지, 더더구나 영화역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
그때 그 사람들>에서
임상수의 태도는 애당초 분명해 보인다. 그는 그때 그 사람들의 진심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임상수에게 중요한 것은 그날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과 그날 죽은 자들이, 사실은 그런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지배자들이란 TV 사극에서 묘사되듯 근엄하고 엄숙하며, 숭고한 것이 아니라, 군사쿠데타를 통한 집권자들과 그의 수하들은 사실 저열한 남근 주의자들이며 저잣거리의 불량배 패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임상수의 <
그때 그 사람들>에서 또한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상업영화의 가장 기본적 서사 전략인 심리적 동일시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임상수는 이러한 불한당들의 세계에 관객의 심리적 연루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윤리적인 선택이고, 정치적인 전략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개의 쇼트는 영화의 초반과 살해 사건 이후에 나온다. 영화의 초반, 주 과장은 정보부 고문실을 산보 자처럼 거닐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수평으로 트래킹하며, 전경화된 세트를 통해 70년대의 시대상황을 함축한다. 두 번째 쇼트는 살해사건이 벌어지고, 주과장이 현장을 돌며 바닥에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시체들을 돌아보는 장면이다. 공중 부감쇼트로 찍혀진 이 장면은, 가장 미학적인 야심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대한 가장 명백한 ‘알레고리 형상’이다. 다시 말해 임상수가 바라보는 그 사람들의 현대사의 형상이란 바닥에 시뻘건 피를 쏟아내며 죽어간 시체들의 이미지이다. 이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 임상수는 감정이입의 주인공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목격자를 만들어낸다. 주 과장이 그날의 첫 번째 목격자라면, 관객은 그날 그가 죽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게 되는 진정한 목격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법원의 삭제명령으로 잘려나간 후반부 다큐멘터리에는 박근혜가 소복을 입고 태극기에 덮인 관 앞에 서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대규모 장례행렬과, 신성에 가까웠던 박정희를 ‘인간’ 박정희라고 부르며 조사를 행하는 김수환 추기경과, 오열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오래전 필자와 했던 인터뷰에서
임상수는 이 얼굴들을 시대의 거울 이미지로 해석했다. 저 당시 가장 핍박받던 사람들이 가장 슬픈 얼굴로 오열하는 모습과 지금까지 지속되는 그에 대한 환상들.. <
그때 그 사람들>은 그 죽음을 재촉하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