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두 개의 문 김일란, 홍지유, 2012

by.박혜은(영화전문에디터, 전 맥스무비 편집장) 2012-12-28조회 3,554
두 개의 문

2012년을 정리하는 요즘, ‘올해의 걸작’을 톺아내는 시도가 줄을 잇고 있다. ‘관객 1천만 명’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한 한국 영화가 두 편이나 탄생했고, 한국 영화 관객 1억 명 시대에 걸맞게 4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영화도 8편에 달한다. 하지만 2012년을 통틀어 단 한 편의 한국 영화 걸작을 꼽으라면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이라 답하겠다. 이 작품에 ‘걸작’이라는 다소 거창한 수식을 붙여 마땅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많은 영화가 내심 품고 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던 질문을 다시 세상에 꺼내놓았다는 점이다.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두 개의 문>은 ‘그렇다’고 믿었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렇다’고 동의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로는 사회적 이슈를 환기시키는 다큐멘터리에 덧씌워진 해묵은 편견을 가뿐히 넘어섰다는 점이다. ‘의미는 있지만, (영화적) 재미는 없다’는 편견. <두 개의 문>은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 미학적 완성도까지 성취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것은 <두 개의 문>이 갖는 특별한 태도에서 기인한 결과다. 

우선 <두 개의 문>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 작품은 2009년 1월 19일 한국 사회를 참담함에 빠뜨렸던 ‘용산 참사’의 현장을 스크린 위로 소환한다. 당시 수많은 매체가 하루가 멀다하고 용산의 비극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사건에 대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법하다. 알려진 ‘사실’은 이러하다. 용산 재개발 보상 정책에 반발한 철거민들이 용산 남일당 건물을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과 철거민 사이에 격렬한 대치 상황이 벌어졌고, 진압 과정에서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사망했고, 법정 공방을 거쳐 농성을 주도한 철거민 6명이 실형을 선고받으며 사건은 종결됐다. 하지만 <두 개의 문>은 이 사건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질문의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 그 날에 대해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일당 망루 안의 목격자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남일당 건물 역시 철거되어 사라졌다. 잘 알려졌다시피, 1만 쪽에 이르는 수사기록 중 3천 쪽은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그 날의 진실을 규명할 1차 자료의 대부분이 소멸된 상황, 다시 말해 ‘아무도 모르는’ 사건이란 다큐멘터리의 재료로서 적합지 않다. <두 개의 문> 이외에 ‘용산 참사’를 다룬 독립 다큐멘터리들은 ‘소멸된 그 날’이 지난 후, 억울함을 호소하는 철거민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용산을 복기한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두 개의 문>을 만든 김일란 홍지유 감독은 소멸된 기록, 그 자체가 진실의 한 조각임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이 빠진 진실의 조각을 그러모아 퍼즐을 맞추듯 2009년 1월 19일을 스크린 위에 복원해 낸다. 이 지점에서 <두 개의 문>은 굉장히 뜨거운 발화점을 얻었다. 

<두 개의 문>을 구성하는 요소는 목격자와 관계자의 육성 인터뷰, TV 뉴스 영상과 해당 사건을 다룬 신문의 기사, 인터넷 TV의 사건 영상, 경찰의 채증 영상과 진술서, 법정의 육성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작자가 직접 생산한 것보다 이미 완성된, 그마저도 용산 참사의 진실 공방에서 철거민과 대척점을 이루는 경찰과 검찰의 자료가 주를 이룬다. 놀랍게도 양 측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진술하는 ‘그 날’은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중요한 진실을 드러낸다. 철거민과 진압 경찰 모두를 치솟는 불길 속으로 내몬 공권력의 과오. <두 개의 문>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진영을 나누는 선긋기를 버리고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공감과 설득력을 얻었다. 부족한 1차 자료의 제약을 미학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장치로 승화시킨 두 감독의 연출력 역시 대단하다. 관객은 객석에 앉아서 얼굴에 화기가 훅 끼치는 듯한 현장감을 체험하고, 그 불 속으로 내몰린 이들의 고통을 공유한다. 경찰특공대원의 자필 진술서가 화면을 가로지를 때, 그 꾹꾹 눌러 쓴 필체에서 그가 겨우 참고 있는 오열이 심장에 와 박힌다. 어느 한 순간도 <두 개의 문>은 감정에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포기함으로써, 이 영화는 더 뜨거운 움직임을 이끌어냈다. 차가움을 견지함으로써 가장 뜨거워진 영화. <두 개의 문>은 꺼지지 않는 ‘얼음 횃불’을 창조했다. 아마도 이후 많은 다큐멘터리들은 그 불빛을 이정표 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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