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바보선언 이장호, 1983

by.김성욱(영화평론가) 2012-11-28조회 8,526
바보선언

‘레디 고’란 외침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빌딩에서 뛰어내린다. 그는 아마도 영화감독인 듯하다(실제로 이장호 감독이 이 역할로 출연한다). ‘활동사진 멸종위기’라는 정치적인 시위에서나 나올법한 단호한 구호가 들리고, 이어 거리의 바닥에 나뒹구는 신문지마냥 남자의 몸이 뉘어진다. 동칠이라 불리는 한 남자에게 귓속말로 그의 마지막 전언이 전달된다. 이어지는 초등학생쯤 되는 어린아이의 웅변조 내레이션이 들린다. “어느 날 동칠이는 옥상에서 뛰어내린 영화감독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은 영화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스포츠에만 관심이 많았습니다. 영화감독은 혼자서 죽어버렸습니다”

이장호의 <바보선언>(1984)이 흥미로운 것은 이 자살 장면이 몇 편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에 있다. 나는 두 편의 일본영화를 거론할 생각이고 장면의 유사성만이 아니라 그 전언의 교감성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 하나는 와카마츠 코지의 <가라 가라 두번째 처녀>(1969)이며 다른 하나는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1970)이다. 시대와 상황은 제각각이고 나 또한 이 영화들을 상이한 시기에 접했지만(이장호의 영화는 80년대 초에, 오시마의 영화는 90년대에 와카마츠의 영화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이다) 동시대성을 느꼈다. 동시대성이라는 말로 나는 파솔리니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백색치즈>에서 영화감독으로 분한 오손 웰즈는 파솔리니의 책을 인용하며 '나는 과거에서 온 전령사이다. 진정으로 동시대적인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 속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각각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만들어진 세 편의 영화가 지닌 내적인 관계는 주관적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최소한 이 세 명의 작가가 내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80년대에 오시마 나기사와 이장호 감독의 관계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2002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한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때에 이장호 감독은 <소년> 상영 시 그가 일본에서 이 영화를 ATG 상영회의 노천극장에서 보았던 경험과 오시마 나기사 감독과의 개인적 친분에 대해 말했었다. 와카마츠 코지 감독과 이장호 감독의 관계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와카마츠 감독은 자신의 영화관에서 이장호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일본의 영화계에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일에 기여했다는 걸 큰 자랑으로 여겼다. 2006년에 개최한 ‘와카마츠 코지 특별전’에서 이장호 감독은 그와 만났던 사연을 서울아트시네마를 방문해 소개하며 그와 재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이 글이 사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와카마츠 코지 감독에 대한 기억에서 촉발됐다는 말을 밝히고 싶다). 

이런 내밀한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음의 일로, 여기서는 앞서 말한 시대착오적인 동시대성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바보선언>에 대한 어떤 내용적 독해도 여기서는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이 작품이 다른 영화와 맺는 코레스판던스에 대해서는 논의할 것이다). 이 세 작가의 작품을 연결하는 공통의 지점은 물론 자살에 있다. 그 맥락은 물론 다르다. 다만 옥상에서 뛰어내린 어떤 이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산의 (정치적)영화적 가치의 교호성으로 흥미롭다. 미학자인 디디 위베르만이 반딧불의 잔존에 관한 아름다운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서로 다른 시대를 상상하는 방식 속에서 우리의 정치하는 방식의 조건을 고려하는 것, 그것은 시차를 넘어서 잔존하는 것을 살펴보는 일이다. 

지난달에 도쿄에서 열린 일본영화와 관련한 심포지엄에 참석해 나는 이런 시대착오성에 대해 이야기를 잠깐 나눴었다. 60~70년대 일본영화의 국제적 수용이라는 주제로 영화제 프로그램의 기획자들, 학자들이 서로의 견해를 나누는 자리였다. 시대착오적인 동시대성이란 내게는 이런 식이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를 처음 제대로 접한 것은 90년대 초의 일이었다. ‘제대로’라는 표현은 그때 처음으로 <일본의 밤과 안개>(1960)와 <도쿄전쟁전후비화>를 봤기 때문이다. <감각의 제국>(1976)을 보았던 터이긴 하지만, 오시마의 영화는 이 두 편으로 꽤 충격적인 느낌을 남겼다. 당시 문화학교서울이라는 작은 비디오테크에서 뒤늦게 본 셈인데, 그전까지 달리 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을 다룬 이야기나 형식이 꽤나 흥미로웠다. 안보투쟁 이후 좌익정치운동을 둘러싼 패배의 분위기와 심각한 절망감, 학생운동 내부에서 발생한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디스커션 드라마’의 형식으로 풀어낸 독특함에 깊은 공감했다. 30년 전의 영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현실감을 얻었다. 마치 당대의 한국현실을 질타하는 영화처럼 보였다. 그 무렵 한국에서도 사회정치적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1990년에는 <파업전야>가 자주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정부가 영화 상영을 금지시켜 대학교에서의 자주상영을 둘러싸고 경찰과 대치하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같은 해에 지리산 파르티잔의 이야기를 그린 정지영의 <남부군>이 개봉했고, 좌절한 학생운동가의 이야기를 그린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이 개봉해 열띤 호응을 얻었다.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또한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영화였다. 새로운 사회파 영화들이 만들어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초에 한국사회가 직면한 현실은 영화가 보여주는 문제를 훨씬 상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1년의 ‘5월 투쟁’은 지극히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1991년 4월 26일, 시위를 하던 명지대학교 학생 한 명이 전경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죽은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시위가 한 달 넘게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11명의 목숨이 희생됐다. 91년 5월 투쟁은 당시 6공화국의 집권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표출되었던 권력형 대형비리와 공안통치, 장기집권을 향한 정권야합에 대항한 사건이었다. 여러모로 87년에 있었던 6월 투쟁과 맥을 같이 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실패로 끝났고, 진보운동에 대한 반동적인 이데올로기 공세가 드세게 전개됐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린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벌어졌고, 당시 참교육을 주장하던 전교조 교사들을 해직시킨 국무총리서리에 대한 학생들의 밀가루-계란 세례에 언론이 ‘극악한 악행’이라 매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발맞추어 민주화운동진영에 있었던 일부의 지식인들이 당시의 운동세력을 매도하는 글을 써대기 시작했다. ‘조선일보’에 실린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 환상을 갖고 누구를 선동하려 하나’라는 글이나 서강대 총장의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라는 글이 대표적이었다. 90년대에 현실은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으로 그즈음에 <일본의 밤과 안개>와 만났던 내 경험이 각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실 정치의 문제를 대담하게 풀어낸 것에 놀라웠고, 숨겨진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 매료됐다. 터부시 된 이야기, 상기하기 곤혹스런 과거의 기억을 드러내는 방식에 놀랐었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면,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에서의 영화감독의 자살은 어떤 질문처럼 다가왔다. 나는 이 영화를 고등학생 시절에 사당동의 재개봉관 이수극장에서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장호 감독의 영화는 그 시절에 한국영화의 대명사처럼 다가왔다.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린 것은 앞서 언급한 두 일본작가의 영화를 접하면서이다. 가령, 이들의 영화에서 죽음이 어떤 하나의 귀결인지(시대적 상황의 결과) 아니면 어떤 선언인지(영화 멸종선언)는 모호하다. 예를 들어 와카마츠 코지의 <가라 가라 두번째 처녀>에서 강간을 당한 여인과 살육을 행한 남자가 옥상에서 동반 자살할 때, 그들은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옥상 아래로 몸을 던진다. 이들은 자살에 이른다기보다는 사실 몸을 던진다고 말할 수 있다. 옥상이 와카마츠 코지 감독의 영화에서 거대한 밀실이라면 그곳에서 몸을 내던지는 행위는 죽음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뛰어내림은 와카마츠의 영화에서 (권력의)중력을 탈피하는 무중력(혹은 부력)의 힘이기도 하다. 종종 카메라는 인물들을 부감으로 잡아내는데, 옥상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세계를 벗어나 거리로 몸을 던지는 행위 또한 이러한 중력을 벗어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오시마 나기사의 <도쿄전쟁전후비화>는 ‘카메라로 유서를 남긴 사나이’라는 부제가 더 적절해보이는 데 왜냐하면 카메라로 유서를 남긴 젊은이의 죽음의 이미지가 가장 강렬한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만큼 빈곤하게 죽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마치 낮에 겪은 시간을 밤에 꾸는 이미지들로 대치하는 듯한데 여기서 밤의 이미지란 (카메라로 촬영해 필름에 흔적을 남긴) 영화이다. 가장 주관적이고, 모호한 내적 경험이 이 이미지들을 구성하고 이야기하는데, 그리하여 이 이미지는 증언이자, 동시에 생성 중인 정치적 역사에 대한 예견과 예언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에는 죽어가는 자의 권위라는 문제설정이 있다. 와카마츠의 영화나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는 모두 (영화와 정치의)소멸과 한계화의 과정에서 취약한 시간적 조건과 대면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아마도 영화를 할 수 있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문화적 조건을 살고 있었기에 그러했을 것이다(이른바 ‘활동사진 멸종위기’). 하지만, 죽음이 남긴 유서는 신체가 남긴 것으로(가령 <도쿄전쟁전후비화>는 신체와 이미지를 계속 결합시키는 불가능한 시도를 보여준다), 그러하기에 무기력이 남긴 외침은 도리어 완전히 다른 질서에 속하는 반박의 역량을 구성할 수 있다. 

이장호의 <바보선언> 또한 그러한 선언의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죽음은 이중적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그들의 죽음을 보고 무언가의 소멸이 발생했다는 걸 감지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소수성, 우리의 고유한 욕망, 공동체와 운동체에의 갈망, 다른 이와의 커넥션을 만들려는 의지들이 소멸과 죽음에서 다른 시대착오적인 시간들과의 다른 커넥션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젊은이들의 행동과 제스처들의 기억, 거기에 수반되었던 욕망을 그 만큼의 영화적(정치적) 역량으로 다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소비의 회로에 놓인, 혹은 예술마저도 이러한 권력 속에 회수되어버리는 한계화 된 영화들을 다시 쫓고 뒤늦지만 새롭게 커넥션을 발견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동시대성을 사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게 이장호의 <바보선언>이 여전히 의미 있게 동시대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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