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내 고향 강홍식, 1949

by.김선아(영화평론가) 2012-01-12조회 3,084
내 고향

‘한 미디어의 내용은 언제나 또 다른 미디어이다.’ 미디어 이론가인 마샬 맥클루언의 이 말의 의미는 최초의 북한영화라고 알려진 <내 고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샬 맥클루언과 북한영화를 연결하는 것이 생뚱맞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이 원고 란은 ‘한국영화 걸작선’이 아닌가. 그래서 한국영화 걸작선에 <내 고향>을 꼽은 이유를 몇 자 적어야 될 것 같다. 지난 2011년 12월 17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은 돌연 한국에게 북한은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한국은 혹시 존재감 없이 존재하다가 위기 때에만 출현하는 타자의 자리에 북한을 놓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북한은 김정일의 <영화예술론>(1973)이 모든 예술론의 기원에 자리해 있고, 정치의 영화화를 가장 성공적으로 이룬 ‘영화국가’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빛을 통해 북한이라는 타자에 드리워진 어둠을 걷혀낼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정치극인 북한영화와 ‘자본’이 개입되어 있는 한국영화를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은 물론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리고 남북한 서로가 교차해서 서술될 만큼의 영화사적 공통 지대를 발견하기도 힘든 실정인 건 사실이다. 이러한 난점을 타개할 만한 역사적 기술 방법 중 하나는 개별 영화들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이 아니라 영화의 매체성, 즉 영화라는 미디어가 여타의 전통적 예술매체 및 대중매체와의 차이와 융합을 통해 어떻게 제 정체성을 갖추어 갖는가를 영화사적 관점에서 파악해 보는 것이다. 

한정된 지면으로 인해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 보자. 북한 최초의 영화인 <내 고향>은 해방과 한국전쟁 사이의 시기인 1949년에 만들어졌다. 이 시기 북한은 해방 후 식민지 자본주의를 벗어나 토지개혁(1946)을 단행하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인민위원회(1947)가 수립된 시기였다. <내 고향>은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까지를 독립군의 아들인 머슴 관필이 항일 빨치산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영화에 벌써 ‘대한독립 만세’가 아니라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말로 해방의 기쁨을 표현하는 군중 장면이 등장하고 있으니, 북한영화는 그 시작부터 김일성이라는 수령을 서사의 해피엔딩을 위한 촉매제로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더 흥미로운 건 ‘극’영화라는 형상을 갖추기 위해 또 다른 미디어를 차용하는 제 방식에 있다. 이 영화는 연극, 미술, 음악 등 전통적인 예술매체를 칸트식의 ‘합성하여 표상하는 능력’, 그야말로 종합판단이 가능한 하나의 ‘완성’으로서의 예술작품으로 영화매체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다. 북한에서 극영화를 현재까지 예술영화라고 명명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인 건 최초의 대상이 갖고 있는 불완전성이 오히려 또 다른 미디어를 불러들이는 토대가 된다는 점일 것이다. 

<내 고향>은 고향의 풍경을 담은 풍경화에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아예 필름에 선을 입혀 더욱 회화적 특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회화와 애니매이션을 영화에서 구분하기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주와 관필의 어머니 및 다른 농민간의 첫 대면을 다룬 장면은 회화의 프레임 구성을 그대로 갖고 와서 실내와 실외간의 경계를 움직이면서 동시에 드러낼 수 있는 영화의 능력을 보여준다. 한편 주인공인 관필의 언덕 너머의 초가집은 연극 세트로 지어진 일종의 디오라마이다. 그래서 관필의 집은 미장센만이 아니라 분리된 컷으로 처리되어 다른 영화공간과 구분된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문학 소설은 무성영화처럼 3인칭 시점을 띤 자막으로 차용된다. 관필이 항일 빨치산이 되는 영화의 중간 부분부터 쏟아지는 자막은 해방이 되기까지 연대기적 시간과 그 사이에서의 관필의 활약을 서술하고 있다. 남자 아이의 책 읽는 나레이션과 음악은 반복적으로 등장해서 불완전한 ‘극영화’를 보완하고 있다. 구소련의 몽타쥬 영화에서의 군중 장면이나 이전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의 자료화면 등이 영화의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출현하여 이미지간의 연속성에 간극을 일으켜도 어느새 각종 예술매체의 전시와 같은 영화 이미지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이는 오히려 매체 자체의 집중도를 높이고 보는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결론적으로 <내 고향>은 하나의 ‘극’, 그리고 ‘예술’로서의 영화의 내용은 결국 또 다른 인접 예술매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일의 사망이 불러 낸 생각이 너무 멀리 간 느낌이 있지만 어찌됐든 ‘통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남북한영화사를 사고한다면 이와 같은 영화 매체사적 관점도 고려해 볼만한 대안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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