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정 배창호, 1999

by.김성욱(영화평론가) 2012-01-04조회 3,948
정

배창호의 <>을 좋아한다. 초기작들보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끌리는 영화들이 그의 후기작들인데, 그 중에서도 <정>은 심금을 울리는 영화였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환한 달빛 아래 남편이 외간 여자와 정을 통하는 순간을 훔쳐보는 여인을 비추어보여줄 때이다. 그 때 정말 모든 움직임이 함께 한다. 갈대숲을 가로질러 두 남녀를 분주하게 ?는 여인의 움직임, 나뭇가지를 흔들어버릴 만큼 매서운 바람의 움직임, 그리고 격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 그렇게 정말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그녀는 둘의 격렬한 포옹을 이렇게 묘사한다. “참말로 요상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두 사람이 그러고 있는 것이 밉게 보이지 않았다. 기막힌 심정으로 둘을 바라보는데,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의 절실함이 느껴졌다. 얼마나 좋아하면 그럴까?” 정말로 요상한 것이 이 장면을 보면서 발생한다. 정념의 움직임을 이렇게 아름답게 보여주는 장면은 정말 거의 없다.

데뷔작인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시작해 최근작인 <여행>까지 배창호의 영화는 떠나는 사람들의 여행을 그린다. 언젠가 배창호 감독에게 “왜 감독님의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매번 길을 떠나는가”라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그는 “누군가가 떠나고 다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모습”이라 말했다. 삶은 언제나 다시 무언가를 찾아 떠나고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기에 자신의 영화가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을 초월하는 센티멘털리티와 방랑성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문제는 유랑의 불가피성에 있다. 왜 인물들은 집을 떠나는가? 집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거주할 집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살던 집에서 마음이 먼저 떠났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일종의 ‘퇴거退去의 영화’라 부를 수 있다. 집이 없거나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하여 그들의 필연적인 유랑과 여정, 운명적인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나는 이러한 구도가 웨스턴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가령 한 여자가 마을 어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린다. 저 멀리 신작로 길로 버스 한 대가 들어오고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본다. 배창호 감독의 <>의 초반부 장면이다. 뭔가 특별할 것이 없는 장면처럼 보이지만, 나는 이 시작부가 배창호 감독의 영화가 지닌 무의식을 슬쩍 보여주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황량한 들판을 쳐다보며 서 있는 한 여인, 그리고 어딘가 멀리서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는 그 여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은 말하자면 전형적인 웨스턴의 도입부이다. 아니, 마지막의 풍경이라 말할 수도 있다. 버스가 들어오는 장면에 역마차나 말이 갑자기 나타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배창호의 영화는 웨스턴의 무의식을 작동시킨다.

집에서 출발해보자. 존 포드의 영화 대부분은 집을 잃은 사람들이 새로운 집을 건설해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분노의 포도>는 트랙터에 무참하게 짓밟힌 오클라호마의 집에서 시작해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여정을, <수색자>는 불에 타버린 집에서 시작해 다시 집으로의 귀환 여행을 보여준다. 존 포드의 인물들은 집을 동경하고 향수를 갖고 있지만 불가피하게 그곳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려 한다. 떠도는 사람들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집이 필요하고 가족을 구성하려면 여인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가장 비통한 순간은 존 웨인이 스스로 집을 불태워버릴 때이다. 배창호의 정서가 이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그의 영화의 진정한 주제 중의 하나는 그들이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극적인 가족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가 불가역적이라는 것이다. 인물들이 자신이 귀속해야 할 가족과 공동체를 떠나기에 그들은 이제 한 개인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모색해야만 한다. <>이 보여주는 세계가 그러하다. 이는 여인의 수난사를 다룬 미조구치의 세계가 아니다. 

이 여정은 마음의 거처를 찾기 위한 모험이기도 하다. <황진이>의 한 장면에서 스님은 황진이에게 ‘육체의 거처는 정해진 것이 아니니 마음의 거처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황진이의 여정은 육신의 유랑과 더불어 몸이 계속 낮은 상태로 나아가며 최종적으로 몸은 무너지지만 정신은 고양되어가는 중력과 은총의 이야기다. 배창호의 영화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고정불변한 것이거나 원래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영화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거나 방랑을 거듭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영화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은 집을 떠난 방랑자가 길을 걷는 여정에 의해 생겨나 타인과의 만남으로 생겨난다. 여행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 그것의 불가역성을 거스르는 것은 그의 영화에 흐르는 되돌아가는 시간이다. 직선적인 움직임에 저항하면서 그의 영화는 우리를 끊임없이 과거로 되돌아가게 한다. 과거로 되돌아가야 한다. 좋은 것은 과거에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현실이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배창호 감독은 그것이 원형성에의 추구라 말하는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거기에 뭔가 더 좋은 것이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였던 파스빈더는 언젠가 자신의 영화 작업이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로 집을 짓는 행위라고 말했었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도 그와 같다고 생각한다. <>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새롭게 영화를 만들 결심에 새로운 집을 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를 만들 집을 잃었지만 새롭게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가 거처할 집을 만들었다. 물론 그 집에 거주하는 것은 절실한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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