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임권택, 1984

by.신은실(영화평론가) 2011-07-06조회 4,725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지난 가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임권택 전작전’에서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서부터 백 번째로 만든 <천년학>까지 현존하는 70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이번 전작전은 그간 만날 수 없었던 작품들까지 망라하며 거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다시 없는 기회였다. 

이를테면 데뷔작이자 당대의 흥행작이었던 <두만강아 잘 있거라>나 명실공히 유명한 대표작 <만다라>가 복원되어 온전히 상영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때나, <왕십리>(당대의 명가수 최병걸이 부르는 주제가가 울려 나오는 오프닝 장면부터 얼마나 심금을 울리던지, 허나 정성일 평론가와 함께한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1’ 인터뷰에 따르면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에서 정성조의 음악이 과했다고 여겼던 듯 하다) 등 반드시 극장 스크린으로 보아야 할 시네마스코프 영화를 볼 때는 가슴마저 벅차왔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존재의 소중함을 또 한 번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임권택 감독의 백한 번째 작품 <달빛 길어올리기>가 지난 3월 극장가에서 관객들과 만나기도 했다. <잡초> 등 지금껏 만나지 못한 그의 영화도 한국영상자료원이 새롭게 발굴, 복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어본다.

그 중에서도 1984년 작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는 에로 사극으로만 파악하기 딱 좋은 재킷 이미지의 비디오로 90년대 초반에 본 적이 있었으나, 제대로 된 시네마스코프 화면으로는 이번 전작전에서 처음 보았다. 이전에 비디오로 보았던 영화는 그야말로 ‘사지절단’당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온전하지 못했던 기억만 남겼기에, 시네마테크KOFA에서의 관람 경험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이 작품은 개봉 당시에 많은 관객을 만나지 못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한국영상자료원의 KMDb 집계에 따르면, 1984년 12월 5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해 2265명의 관객만을 만났다). 이러한 흥행 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군부정권 아래서 숨쉬기 조차 힘들었을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추측하기 두려울 정도로, 도저한 멜랑콜리와 알레고리가 넘쳐나는 괴작이자 걸작이 바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였다. 벤야민이 바로크 시대를 다룬 ‘독일 비애극’의 멜랑콜리와 알레고리를 묘파했듯, 시대극인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는 폐위된 연산군에 이어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 치세를 다룬다. 영화가 시작되면 전염병이 도성에 만연해 있는데,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 일파의 원혼 때문에 역병이 창궐한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면서 민심은 흉흉해져만 간다. 발단의 설정부터가 1980년 광주에서 벌어졌던 학살과 그에 이어진 당대의 엄혹한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확연한 알레고리다. 이즈음 성균관에서 촉망 받는 유생 윤지경의 집으로 먼 친척 뻘인 최 참판 일가가 돌림병을 피해 온다. 지경과 최 참판의 딸 연화도 괴질에 걸리지만, 지경이 연화를 돌봐주며 쾌차한 뒤 서로에 이끌린다. 서로를 친척 남매로만 알았던 이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지만, 복잡한 혼인 관계로 실제로는 혈연이 없음을 부모가 알리면서 혼사가 이루어진다. 

한편 왕실에서는 연성 옹주와 지경을 맺어주려 하지만, 지경은 이를 거절하고 연화와 혼례를 올리기에 이른다. 혼례날, 패주와 가까운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중전 신씨 폐위에 가담한 지경의 부친에게 원한을 품었던 왕은 지경에게 부마가 되라는 어명을 내리고 혼례를 강제로 중단시킨다. 지경은 할 수 없이 연성 옹주와 혼인하지만, 연화를 잊지 못해 밤마다 몰래 그녀의 처소를 찾아든다. 이를 알게 된 왕의 진노가 극에 달하자, 연화는 가문과 지경을 살리기 위해 그들이 처음 사랑을 나눈 상여막 앞 물에 뛰어든다.

이 작품에 이은 또 한 편의 시대극 <씨받이>(1986)에서 강수연의 상대역을 맡았던 이구순을 연상시키는 배우 한영수가 남자 주인공 윤지경을 연기한다. 최 참판의 딸인 여주인공 연화를 연기하는 이는 조용원이다. 그녀는 이 영화가 만들어질 즈음 공전의 시청률을 올렸던 TV 드라마 <>보통 사람들>에서 희대의 아역 스타로 등극했으며, 같은 해에 만들어진 하명중 감독의 <땡볕>에서도 주연을 맡는 등 80년대 초 중반을 풍미한 스타였다(짙은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조용원의 가녀리고 고운 자태를 마지막으로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었던 기회는,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에 진출했던 유릭와이의 <명일천애>(2003)였다. 그녀를 스크린에서 조금 더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45도로 구도를 틀어 한옥 안팎을 잡아낸 서정민 기사의 유려한 시네마스코프 촬영, 신분이 달라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죽어간 한 쌍을 진혼하는 혼인굿 등 놀라운 장면들이 많은 이 영화에서도 가장 경이로운 두 장면을 창조해내는 것은 조용원의 출현과 그녀 얼굴의 현존이다. 

예컨대, 죄책감에 옛 빙부의 무덤을 찾은 지경 앞에 죽은 줄 알았던 연화가 나타나는 장면은 미조구치 겐지의 <우게츠 이야기>는 저리 가라 할 명장면이다. 한밤에 무덤 앞에 조아리고 있던 지경의 뒤편에서 죽은 줄 알았던 연화가 화면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쇼트 속에 스며들듯 들어온다. ‘산 채로 매장된 자’가 이 세계와 접촉하는 이 순간, 극치의 환상성과 영화적 아름다움이 생성된다. 이때 들리는 사운드도 놀랍다. 메시앙은 <샤이닝>에 삽입된 바르토크의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을 일컬어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라 했고, 블레즈는 ‘삐걱거리고 물결 아른대는 후광’을 연상했다는데, 이 장면의 소리도 꼭 이와 같다. 돌아온 연화와 하룻밤을 함께하며 지경이 부마궁이 무덤과 같다 푸념할 때, 토막의 흙담을 배경으로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가득한 조용원의 얼굴이 뱉어내는 말, “이곳이 무덤입니다.” 이때 조용원 얼굴의 클로즈업은 그야말로 무덤 같은 당대의 숨막힐 듯한 공기를 육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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