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설가로 명성을 쌓은
이창동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을 때, 많은 이들이 찬탄했다. 단어와 문장으로 승부하던 소설가가 카메라로 시간의 언어를 조탁하는 풍경은 확실히 진기할 뿐 아니라 감탄스러웠다. <
초록 물고기>는 대한민국의 중심부이면서도 서울의 주변부에 불과한 신도시를 배경으로, 불나방 같은 삶을 살았던 청년의 모습을 그렸다. 그의 영상언어는, 꽤나 능숙했다. 현대사의 폭력적인 풍경을 시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
박하사탕>의 구성도 충격적이었다. 악인을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일반적인 피카레스크소설 풍으로 흘러가지 않는 시선 역시 탁월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미묘하게 불편했다. 소재와 주제를 포착하는 솜씨가 너무나 예리해서 계산적으로 보였고, 의도적인 영상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탄탄한 문학을 바탕으로, 나도 카메라를 휘두를 수 있다는 듯 솜씨를 부린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
오아시스>에서 그런 생각을 떨쳐내기 시작했다. 잔재주라고 부르기엔
이창동의 세계가 너무나 견고했다. 의도성을 힐난하기에는, 창조한 인물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연민이 뿌리박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아시스>를 기점으로 이창동은, 다시 문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카메라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언어를 카메라를 통해서 구현하고 있었다. 차기작인 <
밀양>은 철저하게 문학적인 영화였고, 왜 문학이 수백 년의 세월동안 살아남는 ‘영원한’ 매체가 되었는지를 증명하는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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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은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세속적인 사랑에 주목하지는 않는다. 처음 밀양으로 온 신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밀양’의 뜻을 말한다. ‘비밀의 빛.’ 그것은 제목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영화의 테마로 직결된다.
이창동은 지고지순한 사랑이나 애절한 슬픔 같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혼돈스러운 내면을 직시한다. 선과 악이 뒤엉켜 놀아나고, 애정과 분노가 서로를 힐난하다가도 위로해주는 진기한 내면의 풍경.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당연히 존재하는 내면이지만, 관객이 직접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이창동은 더욱 처절한 조건을 꾸며낸다.
남편을 잃고 아이와 함께 밀양에서 살아가는 신애의 모습. ‘불행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신애의 얼굴은, 불행해 보인다. 죽기 이전에 이미 남편은 그녀를 버렸지만, 신애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신애에게서, 신은 가혹하게도 아이를 뺏어간다. 울 기력조차 없었던 신애는 우연히 부흥회에 갔다가 통곡을 하고는 평화로워진다. 슬픔과 절망조차 신의 뜻이라 생각하며 종교생활에 몰두한다. 그러다가 유괴범을 직접 용서하겠다며 면회를 간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이미 용서받은 유괴범을 본다. 과거를 뉘우치지만, 모든 것을 용서받고 평온해진 유괴범을. 하지만 신애가 원한 것은, 자신이 그를 용서하는 의식이었다. 원수를 용서할 정도로 마음을 정리했고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였음을, 자신에게 각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틀어졌다. 그녀는 원초적인 분노에 휩싸인다. 나는 이토록 괴로운데, 어째서 유괴범이 저토록 평온할 수 있는가. 어째서 나에게 고통을 준 악인에게 모든 것을 용서하고 천국을 약속할 수 있는가. 신애는 유괴범을 증오하고, 하나님에게 반항하며 힐난한다. 물건을 훔치고, 장로의 남편을 유혹하고, 자해를 한다. 이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정말로 보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렇게 그녀는 한 가닥의 희망마저 무너져 내린다.
영화의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은 지루하지만, <
밀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이야기가 아니라 영상과 주제만을 말하는 것으로는 <밀양>에 대해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밀양>에 담겨진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 대사 하나와 소품 하나, 인물의 동선과 버릇 그리고 소사(小史)까지 세세히 들여다보아야 <밀양>의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너무 꼼꼼해서, 숨이 막힐 정도다.
이창동은 더 이상 영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여줘야 할 것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 보여준 것들을, 관객이 읽어내고 받아들이게 만든다. <밀양>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을 이해해야만 들어설 수 있는 세계다.
무엇보다 <
밀양>은 종교를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창동은 종교적인 구원에 대해, 신 혹은 세상의 섭리에 대해 완강하고도 끈질기게 이야기한다. 운명처럼, 누군가에게 절망이 찾아온다. 그것을 이겨내는 절대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뎌내야 한다.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망치거나 뭔가에 의지한다고 해서 현존하는 고통과 절망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비밀이다. ‘밀양’이란, 실재하는 소도시인 동시에 세계의 비의(秘意)에 대한 은유로 작용한다. 신은 결코, 직접 우리의 눈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의 빛인 것이다. 이창동은 <밀양>에서 그 빛을 직접 보여주지 않지만, 그 빛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그 너머를 보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