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몽>, 식민지의 슬픈 얼룩
어떤 책의 표지에 <
미몽>(
양주남, 1936)을 두고 근대를 열망하지만 그것에 다다를 수 없었던 식민지(영화)의 꿈이라는 식으로 쓴 적이 있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연민이자 여전히 식민지적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후 비로소 <미몽>을 보았는데, 그것은 참 난감한, 이상한 것이었다. 아무런 설명없이 다짜고짜 여자(애순)는 남편에게 화를 내며 다투었고, 소매치기의 결정적인 수작도 없이 그와 호텔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 남자와 무용을 보러가서는 남자가 자리를 뜨자말자 남자 무용수에게 수작을 거는 것이 그러했다. 또 난데없는 강도사건도 그런 대목이었다. 무용수를 만나기 위해 택시를 급히 부리다 자기 딸을 치는 것은 당시의 영화적 인과율에서야 수용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언제 준비했는지 약을 먹고 죽는 장면은 역시 수상한 대목이었다.
당시 조선영화의 수준이 이 정도로 이야기 인과성이 약하고 전적으로 신파적 서사에 기댔기 때문이라고 판단해버리면 별 이상할 것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역사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왜’라는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 1934년에
이필우의 녹음조수로 입문하여 2년 만에 <
미몽>을 감독하고는 주로 편집기사로 활동한
양주남이 어떻게 이런 독특한 영화를 감독했는지도 의문이었고, 당대 최고의 대중 소설가이자 연극계의 거대 그룹 동양극장의 리더이기도 했던 최독견의 유일한 시나리오 작품인 것도 눈을 끄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다른 일로 경황이 없어서 <미몽>을 붙들고 논구할 수 없었기에 이 영화는 단지 하나의 ‘미제 사건’에 불과했다. 어떤 이는 이 영화를 두고 “2년 뒤 제작되기 시작한 선전영화들에 나타나는 정신주의적 설교와 전쟁 프로파간다의 어떠한 전조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에나 개인에게나 우연한 것이란 거의 없으며, 심지어 우주만물 거의 모든 것이 ‘어떤 맥락’에 속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해설이다.
애순은 그랬다.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설명이 없었던 것은, 열악한 제작 환경 탓도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팜므 파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말했듯, 애순의 이러한 역할은 당시 신여성들을 비난하기 위한 전략적 배치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독견과 당시 대중소설들을 우선 볼 필요가 있다. 조선과 상해를 무대로 청년운동가, 여자신학교 교사, 신문기자, 일본유학생, 미국인 사업가, 중국인 은행가, 부호 사회운동가 등과 놀아난 이화여전 출신 주인공의 남성 편력기인, 최독견의『향원염사』(조선일보, 1928.10.29.~29.10.20), 본부살해사건을 중심으로 치정과 범죄를 결합한 방인근의『마도의 향불』(1934) 등을 <
미몽>의 기본 플롯으로 보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것들은 다시 당시 일본소설과 영화에 등장한 ‘뱀푸’와도 관련을 맺는다. <미몽>의 이야기 틀은 이런 대중소설의 자장 속에서 잉태된 것이었다. 여기에 하나 더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의 ‘현모양처’ 정책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황국신민으로서의 성모(聖母)와 현모양처에 대한 강조는 실제 당시 일본 여성잡지 편집에서 커다란 변화로 지적되고 있다. 일제 통치자에게 ‘신여성’이란 대단히 불편한 존재이며, 이를 단순히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서 극단적으로 응징하거나 적극적으로 다른 모델을 제시할 필요가 그들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애순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죽인 것은 그런 맥락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이러한 의도와 조선영화의 고리는 동양극장의 최독견과 당시 조선과 만주 흥행업의 일인자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무명의
양주남이 감독을 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조만교통국에서 후원한 조선최초의 교통영화로서 사고 예방 홍보 장면이 포함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오류인 듯하다. 자막에 나오는 선만교통타임즈는 일본인 아리카와 有川繁가 운영한 교통관련 작은 신문이다. 따라서 이런 점이 영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글머리에서 말했던 ‘이상하고 수상한 점’은 다시 살펴보니 이상할 것도 수상할 것도 없는 것들이었다. 일본의 영향 아래 놓인 조선의 대중문화, 일본인이 주도한 경성촬영소, 일본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사정 등이 일제의 통치정책과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부조화가 있다. 우선 애순의 이미지는 역과 맞지 않다. 한복, 가리마, 치마 길이 등에서 우선 그녀는 기생의 외양이나 신여성의 그것과 다르다. 당시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며 꿋꿋하게 스타 노릇을 하던
문예봉의 이미지는 그대로 둔 채 악녀의 역할만 맡긴 것이었다. 애순이 남편에게 자기 옷을 살 거라며 콧대를 세우고는 백화점에서 아이 옷을 사는 것 등도 그런 예에 속한다. 흥행을 위한 모순이자, 조선영화의 자기기만이기도 했다. 이는 역사의 얼룩이기도 한데, 이를 두고 한 역사철학자는 ‘역사의 요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글을 보고 혹시 <
미몽>을 친일영화라고 규정하거나 부정적인 요소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졸작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맥락 해석을 위해서 씌어진 것일 뿐 어떤 규정을 위해 씌어진 것은 아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오히려 <미몽>은 그 탄생 배경이 이러하기 때문에 나에게 소중하며, 두고두고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맥락을 파헤치면 언제나 답이 나온다는 믿음을 확인시켜 주기도 하지만, 절대적인 가치나 윤리를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역사 속에서 개인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으며, 상황 논리에 의해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거나 나빠질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