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충녀 김기영, 1972

by.유지나(영화평론가) 2011-02-09조회 3,824
충녀

원초적 본능,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성의 강렬한 성욕이라는 화두, 그로 인한 파괴적 드라마를 집요하게 추구한 김기영은 90년대 후반 재평가된 감독이다. <한국영화 100년>(호현찬)에서 정리하듯이, 김기영은 ‘마성의 작가’, ‘괴상하고 가학적인 개성파 감독’으로, <하녀>, <화녀>, <충녀>같은 ‘이상한 여자 시리즈’를 만든 ‘이상한 여자 전공’ 감독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다. 실제로 그가 죽기 전, 계획하던 작품이 <악녀>였다니, 이만하면 그는 ‘여성욕망 전공감독’ 임에 틀림없다. 

‘여성욕망 전공’ 김기영의 대표작은 영화사책이든 감독론이든 (마치 만장일치제 투표라도 한듯이) <하녀>(1960)로 되어있다. 그러나 <충녀>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생각이 바뀐다. ‘벌레여자’란 제목도 지독하지만, 요기가 느껴지는 윤여정의 커다란 눈을 클로즈업으로 잡고 그 오른편에 나비날개를 단 여자의 작은 나신이 등장하는 포스터는 독침 같은 ‘벌레여자’의 광기를 가늠하게 해준다. 실제로 이 영화는 국도극장에서 개봉, 1972년 흥행성적 1위(서울지역 개봉기준)를 기록했다. 그러니까 그는 시대가 몰라본 외로운 작가가 아니라, 기이한 영화로 대중적 공인을 받은 흥행감독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를 당대 관객이 외면한 저주받은 걸작의 감독처럼 여기는 경향은 그의 스타일이 너무 기이한 극단성에 치우쳐 충분히 이해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자들의 판단에 기이한 것이리라. 

대표작 <하녀>에 가려 이상한 여자 시리즈중 하나로 넘겨지는 <충녀>는 여성의 강렬한 욕망을 전면화하여 가부장적 가정의 위선을 폭로하는 수위에서 보면 <하녀>이상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충녀>는 성불능인 중년 사내가 어린 여자를 첩으로 맞아 남성다움을 회복하지만, 그로 인해 본처가정의 위선이 드러나고, 남자, 첩, 본처가 모두 망가지는 섹스심리스릴러이다. 그리하여 평자들이나 심지어 영상자료원 DB에서조차도, 이 영화를 혼외정사 드라마로 설정한 뒤 건강한 부부로 귀환하는 결말의 메시지로 축약해버린다. 걸작이 되기엔 너무 평범한 도덕적인 평가 중심의 맹숭맹숭한 소개이다. 그런 문맥에서 과격하고 노골적인 성애담으로서의 <충녀>는 가부장적 가정보호용 반면거울 텍스트로 과소평가된 텍스트이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이라는 가족 판타지 강박에서 놓여나 <충녀>를 곰곰이 응시해보자. 그러면 성애의 본질과 심리가 숨막힐 정도로 지독하면서도 거칠게 화면을 장악하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도덕적 메시지로 결말을 얼버무린 이 텍스트가 그런 포장을 넘어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성애의 핵심이기도 하다.

첩의 딸이기에 아버지를 빼앗긴 트라우마를 가진 명자(윤여정)는 오빠의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위해 바에 나간다. 여기서 엄마의 노골적인 요청은 혀를 차게 만든다. 결국 명자는 사장님(남궁원)의 첩이 된다. 이후 관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경제권을 가진 본처(전계현)이다. 사업으로 성공한 가모장 처의 권력에 눌린 남편은 성불능에 빠진다. 남자의 실존적 고민은 남성성의 회복이다. 어린 여자를 첩으로 삼아 회복된 그의 남성성은 이제 본처의 관리대상이 된다. 매일 남편의 몸무게를 달고 식단을 짜고 용돈을 주는 본처는 그 역할을 첩에게 강요한다. 집을 얻어주고 월급을 주기에 그런 계약이 가능하다. 본처와 첩 사이의 이런 계약관계에 달콤한 에로스 에너지가 작동할 여지는 갈수록 소멸되어 간다. 

첩콤플렉스를 가진 명자는 경제적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본처와 가정을 포기하지 못하는 남자를 소유하고 그의 가정을 깨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된다. 그건 외로운 밤을 홀로 견딜수 없는 성욕망에 눈뜬 여자의 심리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계급과 세대, 성의 차이가 벌이는 파국으로 치닫는 투쟁의 에너지가 마그마처럼 부글거리고 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조신하게 본처의 지시를 따르던 명자는 남자를 더 오랫동안 갖고 싶어서 그의 가정으로 쳐들어간다. 첩의 존재에 경악한 아들과 딸은 명자를 해칠 복수극을 꾸민다. 겉으론 계약관계를 준수할 것처럼 냉정하게 행동하는 본처도 역시 명자를 죽일 계략을 구사한다. 가정과 한 여자의 투쟁, 가진 자와 가진 것 없는 자의 투쟁, 남자를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여자들간의 투쟁이 두 집을 오가며 벌어진다. 붉은 명자의 침실/집과 하얀 본처의 침실/집의 대비는 욕망과 억압을 상징적으로 대비시킨다. 특히 붉은 명자의 집에 흰쥐와 흰옷의 아기는 명자를 괴롭히는 남자의 가정과 식구들의 흔적이다. 

명자의 집은 흰쥐가 출몰하고, 피를 좋아하는 어린 아기가 하수구를 드나드는 엽기적인 공포가 지배하는 공포의 공간이 된다. 사라진 아기가 냉장고 속에 들어있는 장면이 반복되고, 아기 젖먹이는 시간을 통보하는 협박의 전화벨이 울린다. 공포와 죽음의 예감, 그 다른 편에는 야릇한 섹스신이 벌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장면은 유리탁자 위에서의 섹스이다. 사탕으로 아이를 상주는 어머니의 권력을 기억해내는 남자를 명자는 사탕으로 유혹한다. 유리 탁자위에 오색영롱한 눈깔사탕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 순간의 금속성 소리와 형형색색의 눈깔사탕의 이미지란 공감각적 황홀경을 준비시킨다. 그 위에서 검은 팬티만 입은 명자는 남자와 섹스를 한다. 유리 탁자 밑에서 찍은 이미지들, 오색 눈깔사탕이 아로새겨진 명자의 몸, 격한 성애의 몸짓들은 유리탁자 위에 사탕이 튀는 금속성 소리와 뒤섞이면서 가학과 피학이 공존하는 기이한 만화경을 연출해 낸다. 이런 에로스 에너지는 이제 타나토스 에너지로 전이된다. 계단에서의 살인극, 실패한 자살극, 어린 아기를 유기하는 가혹한 복수극...결국 좌절된 에로스 에너지는 죽음의 잔치를 벌인다. 도입부에서 여학생 명자가 배웠던 청춘의 정의는 이제 그녀의 유언이 된다. ‘청춘, 그건 기성세대에 도전하는 용기’, 라고. 뜬금없는 시구 같지만 모든 것은 예시된 것이다. 

액자식 구도를 이용해, 결말부분에서 (<하녀>에서도 그랬듯이) 성애의 가정 파괴담을 일장춘몽 에피소드처럼 소개하는 물타기 전략은 유감이다. 그런 틀을 통해 평생 일부일처제 가정판타지를 합리화하는 것. 그것은 검열과 관객의 수용성을 고려한 꾀바른 전략이라는 짐작도 간다. 그러나 그건 관습과의 불화를 억지로 화해하려는 불균질텍스트의 폐해이다. 고다르가 저주한 영화예술에 각인된 치명적인 상업성의 지배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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