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을 이야기하자면, 1980년대라는 시대를 먼저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그런 질문이 나올 법하다. 무릇 대개의 영화는 시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 않느냐고. 물론 그렇지만 <뽕>을 비롯해 그 당시 나온 일군의 장르 영화는 1980년대라는 토양 아래 만들어졌고, 놀랍게도 1980년대가 끝나고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곧 사그라졌다. 1920년대 나도향이 쓴 동명의 원작이 1980년대의 관객에게 왜 그렇게 사랑받았는지 이야기하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1980년대의 영화들과 분위기에 대해 떠올려야만 한다. 혹자는 신군부정권이 국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시도했던 ‘3S정책’을 말한다. 즉, 3S 중 ‘섹스’와 ‘스크린’이 만난 결과물이란 것이다. 확인된 문건이나 증거는 없으나,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은 그 시대를 거쳐 온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바다. 수치적으로도 보아도 1980년대의 영화 문화는 암흑에 가깝다.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막론하고 홍보용 간판에 걸리는 영화 가운데 많은 수는 성애물이었고, 거리에는 언제나 그런 영화들의 포스터가 붙었다 떨어져 나가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영화가 어마어마한 흥행 성적을 기록한 것도 아니다. 그나마 극장을 찾는 관객들의 발걸음을 붙잡는 정도, 딱 그 정도의 흥행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흔히 성애물이라 불리는 영화들 중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라 해봐야 수십만 관객이 다였다. 영화로 치면 정말 암울한 시간이었다.
1980년대의 성애물은 그 안에서 다시 몇 가지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유럽산 성애영화나 스릴러에서 영향을 받은 정체불명의 심리물이었다. <애마부인>(1982)으로 전설을 쓴 이 장르는 여성의 야릇한 심리를 소재 삼아 수많은 아류를 쏟아냈다. 직접적으로 유럽영화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2) 같은 영화가 있었는가 하면,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여자 여자>(1985) 따위의 괴상한 심리드라마도 시도되었다. 둘째는 사회적 메시지에 성애물을 결합한 유였다. <어둠의 자식들>(1981),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83)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다 1980년대 후반 <매춘>(1988) 시리즈로 폭발한 장르다. 셋째가 <뽕>이 포함된 토속 성애물이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1),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어우동>(1985) 등의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소소한 흥행세를 이어간 이 장르는 그 아래로 문예물과 해학물로 다시 나뉜다. <반노>(1982), <자녀목>(1984), <씨받이>(1987), <감자>(1987)>가 전자라면, <변강쇠>(1986), <어울렁 더울렁>(1986), <가루지기>(1988),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1993) 등이 후자의 대표작들이다. <뽕>(1985)의 경우는 다소 특이하다. 굳이 분류하자면 전자에 속하겠으나 이 영화의 영향으로 후자의 영화들이 터져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계 정보로는 십여만 명을 동원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의 부실한 통계 수준을 입증할 따름이다. 개봉관의 성공에 이어 재개봉관으로 내려간 뒤에도 영화의 흥행은 멈추지 않았고 여주인공을 맡은 이미숙의 얼굴이 간판에 그려지지 않은 군소극장이 드물 정도였다. 그 정도가 오죽하면 모 영화잡지에서 ‘(극장 간판마다 그려진 이미숙의 얼굴 가운데) 과연 어떤 게 진짜 이미숙 얼굴이냐’를 주제로 기사를 냈을까 싶다.
<뽕>의 성공이 1980년대를 성애물의 시대로 만드는 데 한 역할을 했지만, 다시 본 <뽕>에는 그 시기의 싸구려 성애물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음 또한 분명하다. 1980년대 성애물의 가장 큰 문제는 남성과 여성을, 섹스 외에는 세상사에 별 관심이 없는 짐승처럼 그려놓았다는 데 있다. 남성은 여성의 몸만 봐도 흥분하고, 여성은 남성의 육체가 다가오면 달아오른다는 식이다. 그런 까닭에 이야기의 개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남녀의 눈빛을 클로즈업한 뒤 베드신을 연출하면 그만이었다. 싸구려 성애물이 하도 많이 만들어지니까, 그런 장면들만 기대하고 영화를 보러 다니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같은 건 별세상처럼 논의되던 시절이었다.
<뽕>의 인물과 이야기는 달랐다. 근대 이전의 남성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편 삼보(이무정 분)나 삼돌(이대근 분)과 달리, 안협집(이미숙 분)으로 불리는 여성은 노동과 재화를 연결 지을 줄 아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독립적인 삶을 도모하는 근대적인 인물이다. 어쩌면 안협집은 1980년대 성애물에서 육체적 굴레에 얽매이지 않은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남편 삼보가 역마살을 핑계로 노름에 빠져 허구한 날 바깥을 돌아다니는 탓에, 그녀는 자신의 몸 하나로 세상을 버텨나가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자본이나 도구가 없는 그녀로서는 반반한 얼굴로 몸을 파는 것을 노동으로 치환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소위 육체적 매력을 따질 겨를이 없는 터, 재화가 없는 상대방에게는 절대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육체적 관계는 곧 돈이나 쌀에 가늠하는 재화를 의미한다.
머슴살이를 하는 삼돌은 힘과 몸을 이용해 살아간다는 점에서 안협집과 다를 바 없으나, 그는 안협집과 반대로 육체의 힘을 독립적인 삶의 바탕으로 사용하지는 못한다. 힘자랑을 하는 도입부에서 보듯 그는 자신의 힘을 노동에 바치면서도 종속된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극중 안협집이 유독 삼돌을 싫어하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으나, 그게 논리적으로 맞다. 자신의 힘을 잘 이용하는 안협집이 그것을 자랑 이상으로 쓰지 못하는 삼돌을 바보 천치로 바라보는 게 당연하다. 안협집에 수작을 거는 삼돌의 시도는 매번 실패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안협집은 그를 더욱 하찮게 여기게 된다. <뽕>은 이대근이 섹스의 아이콘으로 도약하게 해준 작품이면서도 극중 그를 쓰는 방식은 정반대라는 게 특징이다. <변강쇠> 같은 이후 작품에서 이대근은 외모와 힘 하나로 수많은 여성의 구애를 받는 남성으로 분했다. 그의 소문을 전해들은 여성들은 그와 잠자리 한 번 해보겠다고 줄을 서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그런 이대근이 분한 삼돌은 <뽕>에서 내내 내쳐지는 신세를 못 면한다. 삼돌이 힘을 주체하지 못해 식식거릴수록 관객들은 더 크게 웃었다. 원작과 다르게 삼보에게 독립운동가의 뉘앙스를 입혀 놓긴 했으나, 기실 그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 안협집이 준비해둔 노잣돈에 깨끗한 옷을 걸쳐 입고 돌아다니는 거 외에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 않았나. 삼보가 극 초반에 하는 대사 – 허기사 지금 세상에는 섣부른 사내 녀석보다 기집 편이 살기가 훨씬 나니라 - 는 어쩌면 1980년대라는 시대를 풍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박정희에 이어 사내들의 대장으로 군림한 전두환의 기세에 눌려 어지간한 사내들이 풀이 죽어 사는 시대였고, 그들의 주체 못한 힘을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풀던 시대 아니던가. <뽕>에는 그런 못난 남자들을 향한 조롱이 가득하다.
인물과 이야기만큼 빼어난 것은 이미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두용의 방식이다. 극의 도입부를 돌아보자. 1분25초짜리의 짤막하고 기능적인 오프닝 크레디트가 흐르고 난 다음, 마을 풍경을 배경으로 안협집이 삼보에게 따지는 목소리가 나오고, 마을 사내 두 명이 그들에 대해 말하는 모습이 삽입된다. 싸돌아다니는 남편을 흉보면서도 보약을 달이는 안협집의 날렵한 몸짓을, 갓 일어난 삼돌이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안협(安峽)은 강원, 평안, 황해 삼도 품에 있는 고읍(古邑)의 이름이다.) 투전판을 놀다온 남편은 묵묵히 화투를 만지다 화투 패로 묘기를 보여준다. 새침하던 안협집은 어느새 남편의 손놀림에 빠져 신기함을 연발한다. 이번에는 철원 쪽 화투판으로 떠나려는 남편의 입놀림에 속아 그녀는 울다가도 새 옷과 노잣돈을 스스로 꺼내 놓는다. 옷을 입혀달라며 바지춤을 내린 삼보는 슬며시 아내의 얼굴을 더듬는데, 카메라는 관객을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마을 남자들의 힘자랑 풍경으로 훌쩍 넘어가버린다. 절구 옮기기로 힘이 세다는 걸 증명한 사람에게 식량을 내준다는 말에 마을 아낙과 남정네들의 입담이 오가고, 모두가 나자빠진 자리에 힘 센 삼돌이 엉큼하게 일어난다. 그는 한 손가락으로 코를 휭 푼 뒤 절구를 번쩍 들어 기운을 뽐낸다. 술잔치를 벌이려 흥이 난 사람들 사이로 삼보가 새 옷으로 차려입고 마을을 떠난다. 누군가 어디 가냐고 묻자 그는 “뽕 따러 가네”라고 답한다. 그 말에 사람들은 한 열로 줄 지어 “뽕 따러 가세”를 연창하며 춤을 추고, 삼보는 어느새 고개를 넘어간다. 흥겹던 사람들은 일본 순사의 등장에 일순간 수그러들고, 일을 치른 차림으로 방에 앉은 안협집은 텅 빈 고개를 멍하니 바라본다. 음악은 어느새 구슬픈 피리 가락으로 변한다. 그것이 <뽕>의 초반 10여 분 풍경이다. 스르륵 인물을 소개하고 안팎의 공간을 넘나드는 장면 아래로 분위기를 조율하는 솜씨가 과연 이두용답다. 이두용은 <뽕>의 결말부에서 도입부를 거의 정확하게 반복하며 끝을 맺는다.
<뽕>을 다시 보며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나도향의 소설이 그런 것처럼 영화의 생명력이 전혀 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생명은 삶의 에너지에서 나오는데, <뽕>은 많은 에너지를 ‘해학’에서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해학의 사전적 의미가 ‘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인 바, <뽕>의 해학은 구수한 대사에서 나온다. 나는 한국의 판소리보다 해학이 넘치는 예술을 본 적이 없다. 서구의 오페라가 아무리 멋지다 한들, 판소리 언어의 리듬과 힘이 뿜어내는 매력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근대 이후 예술의 형태에서 사라진 판소리 언어의 매력을 그나마 느낄 수 있는 장르가 시대물이다. 1980년대 해학 시대물은 리드미컬한 언어의 맛을 충실하게 전달하곤 한다. <뽕>의 대사 연기야 두말할 것도 없다. 예를 들어 나도향의 원작에서 삼돌이가 삼보에게 안협집의 행실을 일러바치면서 했던 대사들 - "요놈의 자식아! 내 말을 좀 들어 보고 말을 해! 네 계집 험절을 모르고 댐비기만 하면 강산이냐? 이 동리 반반한 사내양반 쳐놓고 네 계집 건드리지 않은 놈이 없다. 이놈! 꼭 집어 말을 하라면 위에서 아래로 내리섬기마. 이놈, 너도 계집 덕분에 노자냥 노름밑천 푼 좋이 얻어 썼지. 그래 집이라고 오면서 볼받은 것이나마 옥양목 버선 벌이나 얻어 가지고 가는 것은 모두 어디서 나온 것으로 아니? 요 땅딸보 오리궁둥아! 아무리 속이 밴댕이 같기로. 그리고 또 들어 봐라. 나중에는 주워먹다 못해서 뽕지기까지 주워먹었다." - 도 거의 다 살아남았다. 특히 안협집과 삼돌이가 다투는 대사는 압권이다.
삼돌: 포도밭에는 왜 갔었소 그려?
안협: 남이야 어디 가고 안 가고 임자가 알아 뭐할 게여. 나 참 별 꼴사나운 소리 다 듣겠네 원.
삼돌: 아 그리 성낼 거 뭐 입습나, 아 임자 잔등에 포도가 뭉개져 있으니까두루 해보는 말이지. 어디 가서 누워 있다 왔습나.
안협: 아 남이야 어디 가 누워 있다 오든 말든 니가 상관할 게 뭐야, 어이구 참 어이구 비켜.
삼돌: 혼자 먹는 밥이 왜 이렇게 많누 그래. 누가 오기로 했나?
안협: 또 횡설수설하고 있네.
삼돌: 아이고 거 밥 냄새 좋다. 아이 그 뜸이 잘 들었나?
안협: 어이구 비켜, 이 망나니 같으니.
두 사람의 대사 연기 외에도, 양택조 같은 조연배우들이 쏟아내는 대사들은 영화 전체에 리듬과 힘을 제공한다. 따지고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1985년이면 전두환 정권이 살벌하던 시절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우울하지 않았던 시간이 별로 없겠지만, 전두환 시절은 특히 끔찍했던 때다. 그 시절에 <뽕> 같은 영화는 흡사 평범한 민초가 죽지 않았음을 방증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내 말이 과하다 싶으면 영화를 먼저 보면 될 일이다. <뽕>은 시시한 성애물이 아니다. 힘과 웃음이 살아 숨 쉬는 작품이다.
# 이 장면은 꼭!
<뽕>에는 많은 사랑스러운 장면이 있으나 그중 유독 좋아하는 게 하나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오랜만에 집을 찾아온 삼보가 안협집과 말다툼을 벌이다 손찌검을 하게 된다. 소설과 다르게 영화에서 삼보는 평소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아니라서 안협집은 코피를 흘리며 실신해 버린다. 놀란 삼보는 의사를 불러 오는데, 안협집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을 닦다 미소를 짓는다. 그날 밤, 안협집은 흰 종이로 코를 막은 채 누워 있다. 삼보는 돌아 누운 안협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장만 보고 누웠다. 안협집은 피로 물든 종이를 코에서 빼낸 다음 흰 문풍지를 찟어 동그랗게 말아 새로 코피를 막는다. 요즘 같으면 솜이나 티슈를 쓸 텐데, 보는 사람의 마음이 짠하다. 여리면서도 강인한 여성이 느껴지는 덕분에 나는 <뽕>에서 이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몇 마디로 설명을 해놓았지만 정말 말로 설명하기가 힘든 정서가 깃든 장면이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