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용 감독의 <뽕>은 1980년대 ‘토속적 에로티시즘’의 대표작으로 각인된 영화다. 이 영화는 당대 흥행에 크게 성공한 것은 물론 국내외 영화제에서도 여러 상을 탔음에도 불구하고, 비평에서는 ‘오락적 흥미 본위의 성애물’로 분류되며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후 <뽕2>(1988), <뽕3>(1992), <1996 뽕>으로 이어지면서 ‘뽕’이라는 말이 지닌 원초적 어감이 강화되어 ‘성애 영화’로서의 이미지가 고착되었고, <변강쇠>(1986) 시리즈와 함께 계보를 형성하는 희극적 에로티시즘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뽕>은 왜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나
그러나 따지고 보면 <뽕>은 나도향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문예영화다. 게다가 이두용 감독은 <피막>(1980)으로 198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을 수상하고, <물레야 물레야>(1983)로 1983년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입선한 ‘국제적인’ 감독이었다. 또한 주연배우 이미숙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로 여우주연상을 휩쓸고, <고래사냥>으로 흥행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여배우였으며, 각색자 윤삼육은 특히 사극 장르에서 재능을 발휘한 당대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였다. 요컨대 이 영화는 좋은 원작을 저본으로 삼아 당대 최고의 영화 인력들이 모여 만든 야심작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토속적 에로티시즘 영화의 계보는 1960년대 <산불>(김수용, 1967)이나 <내시>(신상옥, 1968)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그것이 1970년대에 제대로 발로되지 못하며 도착성으로 저류하다가 1980년대 3S정책과 컬러TV 보급의 영향, 그리고 ‘국풍(國風)’의 흐름 속에서 전근대(적) 사회 여인의 수난을 알리바이로 삼는 성애영화로 발현되기에 이른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를 비롯해 <물레야 물레야> <자녀목> <땡볕> <어우동> <씨받이> 등이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작된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한결같이 비극으로 점철되며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 자세를 취했고 나름대로 진지한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에 비해 <뽕>은 웃음을 주조로 삼으며 뚜렷한 주제의식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점에 차이가 있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 장르는 예술로 평가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웃음은 ‘단순한 오락’이고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벼운 해소’로 인식되며 코미디 영화는 언제나 ‘예술’의 범주에서 쉽게 제외되곤 했다. <뽕>이 문예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통속적 성애물’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러한 인식에 연유하는 바 크다. 그리고 이 지점이 다른 영화들에 비해 <뽕>이 가볍게 취급되거나 본격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속되기 힘들었던 두 요소의 병치
그러나 ‘웃음’이야말로 <뽕>에서 공존하기 힘든 불균질한 요소를 결속하는 아교이자 영화에 활력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기능하며 이 영화가 성취하는 신선함의 중추를 담당한다. <뽕>은 웃음을 기반으로 이전 영화에서 결속되기 힘들었던 두 요소, 즉 ‘화냥녀 아내 안협집’과 ‘독립운동가 남편 삼보’를 병치해 의외의 효과를 창출한다. 원작에서 삼보는 그저 “땅딸보 오리궁둥이 투전꾼”으로, 삼돌에 의해 마당에 패대기쳐지고 그 화풀이를 아내에게 하는 못난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삼보를 도인의 품격을 풍기는 정체불명의 룸펜으로 만든다. 삼보는 무심한 듯 사내답고, 초연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비애에 젖어 있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뒤따르는 일본 헌병은 그가 일제강점기 요주의 인물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암시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확증에 가까워지고, 이에 따라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에로티시즘보다는 안협집이 처한 현실적 맥락, 즉 남자가 제 구실을 못하는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여자의 상황이 부각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전환된다. 이에 대해 개봉 당시에는 “분망한 섹스 행각과 시대상이 상치”되고, “뜨거운 장면 뒤에 각박한 생활을 연결시킴으로써 섹스 장면을 포장”하고 있으며, 이는 “사실성이나 예술성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생활인이자, 팜므파탈이자, 억척스러운
그러나 프랑스혁명 직전 귀족사회의 ‘위험한 관계’를 19세기 조선사회의 ‘스캔들’로 가져왔을 때 의외의 결과가 빚어지며 조선사회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지평이 열렸듯이, 이 영화도 웃음을 수반하는 성애놀이로 식민지 시대를 투과시킴으로써 ‘엄숙한 독립운동의 시대’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조망을 가능케 한다. 존경받아야 하는 독립운동가는 아내의 성매매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못난 남편’이 되고, 남자가 제 구실을 못하는 시대에 정조를 파는 일은 비단 비천한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독립운동’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초반에 삼보를 뒤따르는 헌병이 등장하자 삼돌(이대근)이 나서서 정중하게 인사하는 장면이 있다. 삼돌은 안협집이 한사코 마다하는 사내로 끝에 가서 삼보에게 안협집의 행실을 고해바치는 비루한 인물이다. 이러한 삼돌의 패배는 초반 장면에서부터 암시되는 셈이며, 이는 삼보의 행동이 지니는 명분에 대한 공인, 그리고 그에 따라 안협집의 행동에도 정당성이 부여되는 연관 고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분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것은 삼보의 존재감과 안협집의 매력이다. 삼보는 영화의 맨 앞과 맨 뒤에 등장해 방랑시인과 같은 카리스마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삼보의 등장은 전체 구조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며 영화의 몸통을 이루는 안협집의 행동에 강한 존재감을 드리우고 동시에 그것을 감싸 안는 역할을 한다. 한편 안협집은 특유의 당당함으로 영화 전체를 주도한다. 한국문학사에서도 안협집은 두드러지는 여성 인물이다. <뽕>과 동시대에 나온 단편소설에는 ‘복녀’(<감자>), ‘계집’(<물레방아>), ‘아내’(<소낙비>) 등의 이름으로 무능한 남편과 돈 때문에 성매매를 하는 아내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상대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돈에 매달리는 데 비해 안협집은 “정조가 헤프기로 유명한 만치 또 매몰스럽기도 유명하여 한번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죽어도 막무가내여서 만 냥 금을 주어도 거들떠보지 아니하고”, “맘에 드는 서방질은 부정한 일이 아니요, 죄가 아니요, 모욕이 아니나 마음에 없는 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당하는 것은 무서운 모욕”으로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안협집이 영화에서는 잇속과 셈속에 밝은 생활인이자, 계층과 연령에 상관없이 마음만 먹으면 남성을 좌지우지하는 팜므파탈이자, 자신의 매력을 질시하는 동네 아낙들의 횡포에 맞서는 억척스러운 여성으로 거듭난다.
햇발 아래 던져놓은 여성의 생명력
이 독보적인 캐릭터가 시대와 만나면서 흥미로운 충돌과 균열을 드러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삼보는 안협집의 행실을 폭로한 삼돌을 곤죽으로 만들고 나서 아내를 때리며 뽕밭에 몇 번 갔느냐고 다그친다. 이에 안협집은 ‘딱 한 번’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정황을 연출하며 ‘무게 있는 남편’, 혹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권위에 가려져 있던 삼보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낸다. 그리고 안협집의 개성과 생명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마지막에 남편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안협집의 뒷모습은 비극적 수난 여성의 정조를 풍기기는 하나, “뽕을 따야 님도 따지”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지는 삼보의 뒷모습 위로 흐르는 타령의 활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협집의 생명력이 변함없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써 이 영화는 민족, 독립과 같은 엄숙한 영역에 대해 다시 생각케 하는 동시에 음화와 같은 밀실의 상상력으로만 저류했던 성적 욕망을 여성의 생명력과 중첩시켜 햇발 아래 던져놓는다. 이분법의 균열과 교란, 그리고 역사의 엄숙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냉전체제의 종식 이후 그것도 2000년대 들어서야 ‘퓨전’ 혹은 ‘혼성’의 이름으로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에서 불균질한 요소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지점은 이질성의 모순과 충돌이 빚어내는 포스트모던적 의외성의 선취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