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동심초 신상옥,1959

by.한창호(영화평론가) 2015-03-17조회 5,737
동심초 스틸

신상옥 감독은 동경미술학교 출신이다. 그의 작품이 유난히 미술적인 매력에 주목하고 있는 점은 우연이 아닐 테다. 화가가 주인공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반 고흐의 꽃을 닮은 독특한 오프닝 크레딧의 <자매의 화원>(1959), 꿈을 꾸는 듯한 몽환적인 장면이 인상적인 <벙어리 삼룡>(1964), 또는 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암시로서의 마을 전체 풍경의 묘사 등은 신상옥의 미술 취향을 잘 설명하는 대목이다. 1950년대 후반 신상옥의 멜로드라마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동심초>(1959)도 전체 마을을 묘사한 첫 화면부터 미술적인 매력을 압도적으로 보여준다.

롱숏으로 잡은 서울의 어느 마을 풍경인데, 마치 독일 표현주의의 걸작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의 불안한 도시를 보는 듯하다. 비탈진 산의 정상 부근엔 하늘로 치솟은 교회 탑이 보이고, 그 아래로는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전통의 존재와 서구 문명의 유입 사이의 불균형이 기묘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데, <동심초>는 그런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 멜로드라마이다. 

숙희(최은희)는 1950년대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캐릭터인 전쟁미망인이다. 대학생 딸(엄앵란)과 함께 살며, 작은 양장점을 운영하고 있다. 출판사 간부인 상규(김진규)의 도움으로 겨우 양장점을 꾸리고 있는데, 사실 그와는 비밀리에 사랑도 키워왔다. 하지만 숙희는 남들의 눈이 무서워서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상규라고 별로 나을 것도 없다. 이미 약혼녀(도금봉)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혹시라도 숙희가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진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동심초>가 개봉될 당시는 더글러스 서크의 소위 ‘최루성 멜로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며 관객의 눈물을 자극할 때였다. 이를테면 <순정에 맺은 사랑 All That Heaven Allows>(1955)에서 보듯 서구에서도 미망인이 사랑을 하는 것은 여전히 ‘주홍 글씨’의 일탈이었다. 

상규의 친구(김석훈)는 물론이고, 자신도 미망인인 상규의 누나(주증녀)도 두 사람의 관계는 중단하는 게 옳다고 충고한다. 말하자면 전통의 명령을 따르는 게 순리라는 입장이다. 상규와 숙희의 관계를 지지하는 유일한 인물이 숙희의 딸인 ‘대학생’이다. 곧 당대 소수의견의 대변자이자 새로운 문명의 학습자이다. <동심초>는 이 두 진영, 곧 구질서와 신질서의 길항관계를 꾸준히 비교하며 극의 긴장을 끌어가고 있다. 상규와 숙희가 한 번쯤은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육체적 표현도 서슴지 말았으면 하는 순간에도 화면은 두 사람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다. 영화도 사회적 평판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이용하는 게 ‘꿈’의 장치다. <벙어리 삼룡>에서 말했듯, 꿈은 신상옥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종종 쓰는 모티브다. 숙희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고향으로 내려갔고, 상규는 그곳까지 따라갔지만 그녀를 만날 수 없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도착한 그 날 밤, 숙희가 숙소를 찾아와 두 사람은 달빛 아래의 들판에서 데이트를 즐긴다. 역시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같은 들을 배경으로, 두 사람은 사랑을 고백하고, 상규는 숙희를 간절하게 끌어안는다. 바람에 몹시 일렁이는 풀처럼 두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고, 관객의 마음도 흥분된다. 상규가 아침에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는 말이다. 신상옥 감독은 이 장면을 루이스 부뉴엘의 초현실주의 영화처럼 꿈이라고 예고하는 장치를 전혀 쓰지 않고, 느닷없이 보여준다. 사실처럼 봤는데, 꿈으로 밝혀진 표현법이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사실상 누구의 편을 드는지 다 보여주고, 통념의 비판은 지혜롭게 피해간 것이다. 

<동심초>가 발표될 당시는 신상옥-최은희 커플과 홍성기-김지미 커플이 본격적으로 경쟁을 벌일 때였다. 두 진영은 멜로드라마를 만들며 서로 힘을 겨뤘고, 그러는 과정에서 한국 영화의 미학도 발전했다. 홍성기 감독은 김지미 주연의 멜로드라마 <별아 내 가슴에>(1958), <산 넘어 바다 건너>(1958) 등을 내놓았다. 두 진영의 경쟁은 <춘향전>(홍성기)과 <성춘향>(신상옥)이 발표되는 1961년에 절정을 맞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술적 매력이 돋보였던 신상옥의 작품 속에 초현실주의적인 요소까지 끌어와, 멜로드라마의 표현법을 확장한 작품이 <동심초>이다. 곧이어 신상옥은 <자매의 화원>, <이 생명 다하도록>(1960) 등 자신의 멜로드라마 대표작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어느덧 신상옥은 멜로드라마 감독으로서의 명성도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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