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영화를 이해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단편 <
지리멸렬>에서부터 <
설국열차>에 이르는 작품들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장면이다. 쉽게 말하자면, 추격전이다. 추격전은 봉준호 영화의 전체 얼개를 이룰 뿐만 아니라 부분적인 디테일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추격전에는 산뜻한 끝맺음을 찾기 힘들다. <지리멸렬> 때부터 그랬다. 때로는 쫓는 자가 나쁠 수도 있고(도색잡지를 가리려고 하는 교수의 경우), 당연한 일이겠지만 쫓기는 자가 더 나쁠 수도 있다. 봉준호의 영화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위상과 캐릭터를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진행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살인의 추억>에서 쫓기는 자는 범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쫓기는 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용의자를 붙잡았다고 해도 그들은 범인이 아니거나 범인임을 증명할 수가 없다. 백광호로 대변되는 살인용의자에 우둔함은 주도면밀한 연쇄살인마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이 영화에서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쫓는 자다. 영화 속에서 첫 번째로 쫓는 자는
송강호가 열연하는 화성군 형사 박두만이다. 그는 힘과 우격다짐으로 용의자들을 잡아내지만 끝내 범인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것은 힘과 우격다짐으로 통치하는 것의 허술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두 번째로 쫓는 자는
김상경이 연기하는 경장 서태윤이다. 그는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이고 박두만에 비해 훨씬 더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소유자다. 하지만 그 역시 범인을 체포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쫓기는 자를 직접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다. 영화 속의 다양한 서사와 흐름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쫓는 자로 인해 일어난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두 명의 쫓는 자를 비교하게 된다. 박두만과 서태윤의 차이는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1980년대를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박두만의 유명한 대사인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대사는 꽤나 인간적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 대사는 꽤 센 욕설일 수 있다. 네가 밥을 먹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말일 수 있다는 뜻이다. 1980년대는 군부독재가 한창이었고, 민주주의나 합리주의라는 것이 꽃을 피우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 가운데 박두만은 폭력적인 당대의 분위기를 대변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폭력과 인간미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1980년대라는 이상한 시절, 혹은 한국 사회라는 이상한 구조가 보여준 역설이 아닌가. 그와 비교가 되는 서태윤은 훨씬 더 합리적이다. 그러나, 1980년대의 합리성은 자연스럽게 인간미가 부족한 경직됨 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흥미로운 차이다. 폭력적인 것이 표방하는 인간적인 얼굴과 합리적인 것이 표방하는 인간미 부족은 1980년대라는 프레임 속에서만 유효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영화의 초반부 장면처럼 용의자들의 몽타주를 제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범인의 윤곽은 붙잡히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분열되어 있다. 군부 독재란 분열적이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기생과 자기 분열 속에서 폭력을 내세우면서도 인간의 얼굴을 강조하는 형상이다. 오늘날 폭력적인 것은 더 이상 인간적일 수 없으며, 합리적이라는 것은 인간미 부족으로 폄하되지 않는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삼는 <
살인의 추억>은 폭력과 인간성이라는 두 양태를 미묘하게 교차시킨다.
이 과정 속에서 쫓는 자의 실패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미 예고된 시나리오다. 역사를 통해 1980년대 화성군 연쇄살인사건은 미제의 사건이며, 1980년대와 함께 미궁 속으로 사라져버린 사건으로 규명되었다. 애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추격전은 서태윤보다 더한 합리성과 과학주의가 들어와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박두만이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서울에서 온 서태윤이 해결하고, 서태윤이 최종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DNA 검사는 국내에서는 불가능하기에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미국의 합리주의와 과학적 데이터마저도 그 혹은 그녀를 범인이라고 지명하지 못한다. 1980년대는 합리성과 과학주의로는 절대 틈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틈을 만드는 것은 시선이다. 그것은 1980년대와 거리를 두고 있는 합리성의 시선이 아니라 누구보다 폭력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형사 박두만의 시선을 통해 부여된다. 그는 1980년대를 몸소 대변하는 사람이며, 그 세월을 견뎌낸 인물이다. 박두만이야말로 시체보다 더 중요한 1980년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시 사건을 해결할 수 없지만 1980년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세월이 흘러도 또 다시 그 시절을 응시하면서 이해하고 다가가 보려고 애를 쓴다. 그리하여, 박두만의 시선은 바깥의 합리성을 통해 1980년대라는 미궁을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1980년대라는 변태적이고, 복잡한 내부의 시선을 통해 ‘내파’를 시도하는 시선이다. 그것은 일정하게 울림을 만든다. 왜냐하면, 바깥에 서서 한 시대상을 바보 같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비판적 자세이기 때문이다. 인사이더의 시선으로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볼 때 비로소 구멍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추억에 모멸감을 안겨주는 ‘살인’의 공포가 압도하여 피 흘리는 구멍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이 때부터 외부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괴물> <
마더> <
설국열차>), 이 모든 것은 내부의 피 흘리는 구멍을 통해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괴물>은 한국 사회 구성원의 균열이며, <마더>는 어머니의 신화라는 것 안에 내장된 폭력성이며, <설국열차>는 앞 칸과 꼬리 칸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폭발해야 되는 것은 바깥이 아니라 달리는 기관차 자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