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암살자 이만희,1969

by.김성욱(영화평론가) 2015-09-30조회 5,431
암살자 스틸

* 이 글에는 <암살>(최동훈, 2015)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만희 감독의 <암살자>를 기억했던 것은 최동훈의 <암살>을 보면서였다. 유사한 제목에서 연상되기도 했지만, 꽤 이상한 설정이라 여긴 쌍둥이의 등장이 흥미를 끌었던 탓이다. 서스펜스 효과보다는 역사의 반복, 실패의 서사적 논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더블(짝패)의 운동. 안옥윤(전지현)은 자신이 암살하는 대상이 아버지이며, 쌍둥이 동생이 자신과 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이른바 거울의 형상과 마주한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염석진(이정재)이 그런 거울 논리의 왜곡된 현실태라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는 친일파의 암살을 기도했고, 그 반대편의 자리에서 이제는 독립 운동가들을 검거하고, 해방이 되고서는 경찰의 요직을 차지하며, 최종적으로는 해방 전에 내려진 지령에 따라 암살된다. 변혁을 기도했던 자가 그들의 적대자를 닮아간다면 혁명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안윤옥은 거울을 깨뜨리지만 염석진은 닮아간다. 거울과 더블의 논리는 배반과 실패의 서사다. 이 서사에는 거대한 인물(우리가 종종 위인이라 부르는 이들)에의 추종과 그만큼의 질시, 적대감이 뒤따른다. 염석진이 보이는 분열증적 행동과 초조와 긴장은 이런 복잡한 상황을 반영한다. 

경우는 다르지만, 이만희 감독의 <암살자>를 떠올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암살자>의 내러티브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은데, 가령 당시의 검열과 누락된 장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레이션이 들려주는 꽤 교훈적인 말들(영화가 시작할 때 나오는 “죽이고 또 죽인 자를 죽이고, 급기야는 그마저도 죽어가야만 했던. 누구를 위해 죽이고, 죽어야만 했던가. 그 참혹상을 폭로한다”는 말의 진위여부)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라는 다른 문제도 있다. 이 영화를 언급하는 글이 많지 않은 것도 그런 판단의 주저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대체로 이 작품은 그의 졸작으로 치부되고 있다. 하지만 암살자가 살인 행위보다(암살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전개된다)는 표적을 제거하기 위해 가는 느릿한 운동들, 과거를 떠올리는 플래시백과 양식화된 화면들, 그리고 ‘암살자가 죽는다’는 예정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나타나는 제의의 과정들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고도의 수법과 양식이 돋보이는 영화들로, 조심스럽게 이 영화에 매너리즘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내용보다 형식과 기교가 두드러진, 장르의 고전적 균형보다 파괴와 변형을 거듭하는 양식이다. 60년대 후반의 사회적 위기, 영화에 미친 파국이 이런 표상형식에 표출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주 미세하게 어떤 동시대성의 움직임이 여진처럼 이 작품에서 감지된다고 생각하는데-손쉽게 떠올리자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나 스즈키 세이준의 <살인의 낙인>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언급한 장황한 훈고조의 내레이션에 이어 부감 쇼트로 원탁 위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이 보인다. 이상한 장식무늬 원형 탁자(원형은 이 영화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형상이다. 나중에 암살자들에게 살해되는 소년의 보트가 그리는 원형의 운동이 그러하다. 이는 암살자가 암살하고, 또 암살된다는 나쁜 폭력의 반복을 형상화하고 있다 생각한다), 뿌연 담배 연기, 어두컴컴한 방, 여기서 출몰하는 유령들처럼 사람들이 자리에 모이기 시작한다. 암살을 지시하는 대표는 음성적 존재로, 단지 목소리만 들릴 뿐 화면에서 비가시화 되어있다. 그는 일종의 마부제 박사다. 사람들의 목소리 또한 영상과 일치되어 있지 않아(대체로 이 시기의 더빙영화들이 그러한데, 이 영화는 특별히 영상과 소리의 불일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목소리들이 어두컴컴한 방안을 부유하는 인상을 준다. 어두운 방, 텅 빈 화면, 피어오르는 연기, 부유하는 목소리. 고도로 양식화된 표현이다. 이들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당에서 탈당한 남호천 장군을 새벽이 오기 전에 암살할 계획이다. 암살자로 장동휘가 지목된다(그는 이름 없이 암살자로만 불린다). 그가 탁월한 암살자이자, 9년 전 그가 살해한 피살자의 딸을 양육하는 부담을 떠안고 있는, 이른바 인간적 결함(암살자에게 인간성이 있다는 것이 치명적 약점이라 설명된다)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원탁의 바깥, 창가에 서서 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는 두 인물이 보이는데, 그 한 명은 당원 1호(남궁원)이며 다른 한 명은 2호(오지명)다. 이들은 거울을 마주하는 것처럼 좌우대칭의 화면으로 분리되어 보인다. 1호가 암살자를 만나는 장면 또한 앞서의 장면처럼 1호와 암살자의 목소리만 떠돌 뿐, 보이는 것은 뒤쪽으로 창문이 있는 어둑한 방 내부와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뿐이다. 마찬가지로 이는 어두운 방camera obscura이다. 우리는 역사가 아니라 어떤 시학과 마주한다. 

암살자는 내켜 하지 않는데, 이유가 특별하다. “죽음 앞에 비굴하지 않은 자가 있다고 생각하나?” 이번 표적이 남호천 장군이라는 말에야 암살자는 비로소 의욕을 내비친다. 그가 죽음 앞에서도 겁먹지 않은 유일한 ‘위대한 인간’이기 때문이다(이어 다소 설명적인 플래시백이 전개된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플래시백이 직선적 시간에 반복의 시간을 기입하는데, 그 첫 번째 플래시백이 자정을 알리는 시계 소리에 맞춰 그를 암살하러 갔던 실패한 순간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이번 임무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위대한 인간’을 살해하는 그의 마지막 여정이다. 나중에 우리는 두 번째 플래시백으로 그가 남호천 장군 앞에서 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설명이 부족한 장면이지만, 암살자는 죽음에 직면한 타인의 표정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결정적 순간이 그러므로 특별하다. 일종의 노스페라투처럼 암살자는 죽음을 기꺼이 기다리는 ‘위대한 인간’과 마주한다. 장군은 자신을 ‘위대한 인간’이라 칭하는 추종자들의 환대를 부질없는 것이라 말한다. 암살자와 희생자의 만남은 이상한 거울 관계다. 암살자는 ‘위대한 인간’에 비추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비굴한 모습을 파괴하려 들고, 장군은 자신이 불러온 폭력의 반복(말하자면 신화)을 암살자의 손을 빌려 끝내려 한다. 암살은 (반복의) 죽음을 종결짓는 행위다. 암살자 또한 죽는다. 한 명의 죽음은 역사의 문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암살자의 죽음은 또한 예술적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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