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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는, 영화사 연구자들이 섣불리 언급하기가 좀 애매한 작품으로 취급된 감이 있다. 고전적 영화사인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나 2000년대 이후에 집필된 「한국영화사-개화기에서 개화기까지」에서도 이 작품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작품 자체만으로 보자면 그리 처지는 작품이 아니며, 정작
정창화 감독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작품을 늘 중요하게 언급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의 스케일이 작지 않고, 해외 로케이션이 거의 불가능했던 당시 영화제작 상황에서 동남아시아 분위기의 미장센을 꽤 그럴듯하게 만들어내었으며, 정창화 감독 특유의 액션 장면들이 총알과 몸이 뒤엉키는 전쟁의 거친 느낌을 자아낸다. 정창화 감독의 회고에 의하면, 취미로 야자나무를 키우는 사람에게 사정하여 어렵사리 두 트럭을 구해다가, 촬영지인 광릉에다 심어 놓고 촬영장소마다 이리저리 옮겨심기를 거듭하며 어렵사리 찍은 작품이라고 한다. 게다가 5만의 관객이 들었으니 흥행도 성공한 편에 속한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 대한 영화사 연구자들의 언급이 많지 않은 이유는, 작품이 ‘후져서’라기보다는 언급하기 ‘애매해서’라고 보인다. 즉 1960년대 영화사에서 두드러진 몇 가지 경향으로 쉽사리 분류하여 자리매김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나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한 반일적 내용의 액션영화라는 점에서, 이 시기에 한 흐름으로 정착한 만주활극 부류로 설명할 만하다. 그런데 정작 공간적 배경이 ‘만주’, ‘대륙’이 아닌 ‘버마’(지금의 미얀마로, 영화에서는 ‘비르마’라고 발음한다)이니, 만주활극의 전형으로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게다가 주인공인 조선인 지원병의 캐릭터가 강한 친일적 성향에서 출발하여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꽤나 복잡한 인물로 설정되어, 당시 반일적 성향의 액션물들이 보여주는 단순한 인물형과는 거리가 있다.
조선인 학도병인 주인공 마츠모도(
신영균)은 총독부 관리의 아들로 ‘천황’과 ‘나라’(당연히 일본)에 대한 애국심에 불타올라, 안전을 우려하는 애인 정희(
전계현)를 질타하며 당당하게 ‘황군’으로 입대한다. 이 설정부터가 범상하지 않다. 이미 방송극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영화로까지 제작된 한운사 원작의 <
현해탄은 알고 있다>(
김기영, 1961) 이후, 이런 소재의 작품에서는 조선인 학도병을 ‘반강제로 전쟁에 끌려간 피해자’로 그리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이 구도야말로 반일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장 쉽고 대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의 선택은, 친일적 학도병의 자발적 입대라는 설정이다. 게다가 주인공 마츠모도는, 입대 후에도 계속 친일적이다. 동료 조선인 병사들(
김석훈,
이대엽,
남궁원 등)이 군대 내 폭력으로 고통스러워할 때에도, 부대에서 탈출하여 버마 게릴라들 편에서 일본군과 맞설 때에도, 마츠모도는 시종 일본군 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인격적으로 악인인 것도 아니다. 모범적인 군 생활로 소위가 된 그는, 자기 수하의 일본군이 버마 게릴라의 아이를 함부로 죽이거나 포로로 잡힌 여자(
김혜정)를 강간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크게 분노한다. 심지어 조선인 종군위안부(
최지희)가, 속아서 끌려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에도 충격을 받는다. 그는 착하고 반듯하고 모범적인 군인인 것이다. 이런 주인공 설정은, 반일 주제의 영화로서는 아주 이례적이다.
결국 줄거리는, 관객의 민족주의적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 않게, 마츠모도의 참회와 각성, 반일적 행동으로 흘러간다. 급기야 그는 아버지의 친구로 자신을 아들처럼 돌보아주던 사단장(
최남현)을 ‘마츠모도’가 아니라 ‘민수남’의 이름으로, 눈물을 흘리며 쏘아 죽인다. 그러나 이렇게 참회와 각성을 했다고 해서 결말이 시원스러운 해피엔딩인 것도 아니다. 전쟁이 끝나갈 즈음 그는 버마 게릴라들로부터 자신들을 도와주어 고맙다는 감사장(感謝狀)을 받는다. 하지만 그 정도로 자신과 아버지의 죄가 씻길 수 없다며,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마츠모도 부대의 잔인한 진압에 아들을 잃은 버마 게릴라 대장(
주선태)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주인공의 성격 설정이 입체적이고 복잡한 만큼, 마지막의 결말 역시 결코 시원스러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니 일제강점기 배경의 1960년대 영화 속에서 이 작품을 거론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이런 영화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정창화 감독의 작품에서도 이렇게 문제적인 설정은 찾아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설정은 원작자인 김기팔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동아방송(DBS)의 1964년 라디오드라마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김기팔은 한국방송드라마사에서 중요하게 기억될 만한 인물이다. 1980년대 문화방송의 텔레비전드라마 <제1공화국>, <거부실록>과 조기 종방을 당한 비운의 작품 <땅>의 작가가 바로
김기팔이다. 동아방송의 다큐드라마 <정계야화>를 오랫동안 썼고, 영화화된 바 있는 <
해바라기 가족>의 라디오드라마 원작자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방송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사회 비판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던 인물이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작품을 쓴 김기팔의 나이가 고작 28세의 새파란 청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1937년생으로 대학생이던 1960년에 KBS의 100만 환 고료 방송극 공모에 <
해바라기 가족>이 당선되어 방송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시대에 인기를 누린 한운사, 조남사, 김석야 등의 극작가는 물론 이 영화의 연출자인
정창화 감독도 모두 1920년대에 출생한 40대였으니, 그는 10~15살 연하의 새까맣게 아래 후배였다. 1960년에 한운사가 자신의 학도병 경험을 끄집어내어 라디오드라마 <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발표한 것을 필두로, 40~50대에 이른 작가들은 일제히 일제 말의 경험을 피해의 역사로 그려냈다. 광복 20년이 되어 부정할 수 없는 중년이 되어가던 이 시점에서, 이들은 자신의 청년 시절을 소환했다. 청년기에 강렬한 체험을 한 세대들이 20년 후인 마흔 즈음에(마치 <
건축학개론>이나 <응답하라 1994>처럼) 스무 살 시절을 소환하여 작품화하는 것은 대중예술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 시기 역시 그랬던 것이다. 그에 비해
김기팔은 태평양전쟁과 6·25를 열 살 남짓한 어린 시절에 경험했다. 그의 청년기의 강렬한 경험은 이승만 정권 말기 부패와 혼란, 그리고 이를 뒤엎은 4·19혁명이었을 것이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친구와 후배들과 함께 최초의 시민혁명을 고통스럽고 가슴 벅차게 체험했을 것이며, 불과 4년 후인 1964년에 벌어진 한일수교 반대운동 역시 절실하게 체감되는 사안으로 받아들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는, 일제 말에 어떤 이유에서이건 ‘황군’으로 ‘복무’했던 중년들이, 5·16으로 정권을 잡고 ‘굴욕적인 한일수교’(당시 대학생 시위대들은 이렇게 표현했다)를 밀어붙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로지 역사의 피해자이기만 한 것처럼 그 시대를 소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냉철한 비판적 인식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일제의 피해자임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결국 그네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비겁하게 혹은 어리석게 살아온 역사의 죄인이며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작품을 방송할 수 있었던 곳은, 당시 ‘앵무새 사건’ 등을 일으키며 정권 비판적인 색채를 드러냈던 동아방송이었다.(‘앵무새 사건’은 동아방송의 5분짜리 시사칼럼 <앵무새>에서 한일수교에 비판적인 내용을 방송한 것을 문제 삼아, 1964년 7월에 방송부장, 뉴스실장 등 6명을 구속한 사건이다.) 그래서일까, 광복 70주년이자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은 2015년에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는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