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망종(芒種) 장률, 2005

by.김소영(영화평론가) 2016-03-10조회 9,481
망종(芒種) 스틸

장률 감독의 영화 중 재중 동포의 디아스포라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는 <망종>인데 거기서 최순희는 아들 창호에게 “너는 조선족 새끼다. 조선말을 알아야지”라고 말하면서 말을 가르친다. 창호는 ㅁ, ㅂ, ㅊ을 ‘므브츠’라고 발음하면서 조선어를 학습하는데, 별로 내켜 하지는 않아 하면서 TV를 사달라고 조른다. 최순희는 남편이 사람을 죽여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관계로 고향을 떠나 북경 근처 공장 지대, 기차 길 옆 버려진 집에 성매매 여성들과 이웃해 살면서 김치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간다. ‘조선포채’라고 쓰인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행상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김없는 중국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인이다. 그녀는 허가증이 없어 경찰에게 자전거와 김치를 모두 빼앗기기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간다. 이런 최순희에게 김치를 사러 오는 남자들은 이러저러한 호의를 베풀거나 그녀의 육체를 요구한다. 김치를 사러 오던 경찰은 음식 판매 허가증을 내주고, 조선족 자동차 기술자 김 씨는 그녀를 노래방에 데리고 간다. 또 아들이 유리창을 깨어 사과 차 찾아갔던 이웃집 남자는 김치 납품을 주선하겠다면서 자신과의 육체적 거래를 요구한다.

이러한 와중에 최순희가 어느 정도 마음을 여는 것은 조선족 남자 김 씨다. 처음 김 씨가 김치를 사러 왔을 때 최순희는 그의 조선어에 반응하지 않고 중국어로 말한다. 김 씨는 최순희가 담배를 꺼내 물자 조선 여자가 웬 담배냐며 질책하듯 말하다가 괜한 간섭을 했다고 말을 거둔다. 이후 김 씨가 김치를 사러 다시 오자 최순희는 “뭐 사겠습니까?”라고 조선어로 묻는다. 그가 배추김치를 사자, 다른 김치를 덤으로 얻어 준다. 그러고 나서 최순희는 공안들에게 김치와 자전거를 빼앗긴다. 혼자 길을 걸어가던 최순희를 발견한 김 씨는 그녀를 자신의 자전거에 태우고 가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그녀의 배경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이곳은 조선 사람 보기 힘든 곳인데 조선 사람끼리 터놓고 이야기하자고 권유한다.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그래 남편은?”
 “사람 죽였어요.” 
 “뭣 때문에?”
 “돈 때문에” 
 “그래서?”
 “벌 받았지요.”

이후 김 씨는 최순희의 집을 찾아가 잠자리를 함께한다. 최순희와 이웃해 사는 성매매 여성들은 김 씨가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만류하지만 “나도 그리 좋은 여자는 아니지.”라고 대꾸한다. 김 씨의 부인이 경찰들을 데리고 오자 김 씨는 최순희가 매춘을 한 것이고, 자신이 돈을 주었다는 거짓 정보를 부인에게 흘린다. 경찰은 최순희에게 김치 파는 여자가 몸도 판다는 비방을 한다. 최순희는 경찰에 끌려가서 자신의 신상명세를 털어놓는다. 길림성 연길시에서 살던 조선족이며 32세다. 이후 자신의 김치를 사주며 호의를 보이던 왕 경관에게 바로 경찰서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을 잃는다. 왕 경관의 약혼녀가 그들 결혼식 연회 음식으로 김치를 부탁하자, 최순희는 김치에 쥐약을 섞어 버무린 후 배달한다. 결혼식장으로 많은 앰뷸런스들이 도착하고 최순희는 집을 나와 기차 길을 건너 보리밭을 향해 걸어간다. 

조선족의 기표인 김치는 여기서 일종의 카타스트로프, 재앙의 기호로 바뀐다. 김치는 쥐약과 인접한 죽음의 기호가 된다. 영화의 이러한 결말에 다다르기까지 최순희의 김치는 여러 것들과 치환되는 은유이자, 그 이전 7위안의 돈과 교환되는 물물이었다. 영화가 그려내는 일상은 많은 부분, 김치를 담그기 위해 무를 손질하고 배추를 씻는 그녀의 노동의 과정이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는 중국의 조선족이 구성하는 기호적 공간의 미장센을 김치 만들기와 그렇게 만들어진 김치가 팔리고 빼앗기고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김치 파는 사람이 몸도 판다는 조롱과 질타는 남편의 범죄로 조선족이 주로 살고 있는 길림성 연길 시에서 북경 근처의 산업 지역으로 이주했고 가부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조선족 여자가 무엇을 매매해야 하는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조선족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풀려난 후, 그녀는 창호가 조선어를 연습하는 것을 보고 연습장을 찢으면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창호의 죽음 후 그녀는 김치를 독극물로 바꾸어버린다. 

장률 감독은 인터뷰에서 김치와 조선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성일: <망종>은 김치를 파는 32살 조선족 최순희의 이야기다. 중국 사람들에게 김치란 어떤 음식인가. 별미로 찾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결혼식에 김치를 가져다 달라고 하는데, 전통적인 의례인 결혼식에 김치를 올리는 것이 한국인에겐 굉장히 낯설다. 이 영화에서 조선족 최순희가 다른 걸 팔 수도 있었을 텐데, 김치를 팔 때 어떤 울림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나.

장률: 중국에 20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한국에서 4,700만 명 중 200만 명은 굉장히 크지만 그것을 14억 중국 인구 중에 흩트려 놓으면 찾지도 못한다. 옌볜에만 가면 조선족이 많지만, 중국 다른 지방에선 알아보지 못한다. 생긴 것도 같고. 그런데 딱 한 부류의 사람들은 보면 안다. 전국 각지 어디나 김치 파는 아줌마들이 있는데 보면 다 조선족이다. 조선 부녀들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김치 팔아서 잘사는 사람은 없는데, 가난해도 성실하게 계속 그 김치를 밀고 다니며 판다. 중국에서 김치를 아는 사람이 그래서 많다. 그건 <대장금> 때문이 아니다. 그전부터 알았던 거다. 중국에는 행상이 많은데, 그중에서 제일 깨끗한 게 바로 김치 파는 사람들이다. 그건 모두가 인정하는 거다. 먹어도 문제없고 배탈 안 난다고. 그렇게 깨끗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멀리서 바라본다. 고생하면서 저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라면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나의 친척 같고 자매 같다. 그리고 김치를 중국 결혼식에 놓는다는 게 한국인들에게는 이상할 수 있지만, 중국은 요즘 급격히 변하고 있어서, 결혼식 음식이 완전 짬뽕이다. 중국 물만두 올라왔다가, 서양식 요리가 올라오고....

32살 최순희가 김치 파는 아줌마로 등장할 때, 그녀는 위와 같은 김치-조선족 여자-성실-청결 등의 기호적 작용 속에서 감지된다. 조선족 여성의 김치에 관련된 재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김치가 독약으로 바뀔 때, 문화적 접촉이나 번역이 이루어지는 경계를 가지고 있는 세미오스피어(semiosphere)가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로 바뀐다. 두 세계를 잇는 마술사 대신 앰뷸런스가 등장하고, 조선족 여성과 나머지(여기에는 조선족 남성도 있다)의 적대는 폭발한다. 남편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가고, 그래서 연변을 떠나 이 북경 근처의 공장 지대에 왔던 최순희는 아들을 잃고, 생계의 수단이었던 김치에 쥐약을 타 몇 대의 앰뷸런스가 오는 재앙을 만든다. 청결한 맛은 치명적인 독으로 바뀐다. 김치는 두 개의 문화를 매개(catalyst)하는 대신 재앙(catastrophe)이 된다. 그녀가 독김치로 의미화하는 것은 급진적 거부다. 자신의 김치를 필요로 하고 샀던 모든 남자들에 대한 부정이다. 그녀의 김치는 7위안이라는 돈으로 교환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조선족 김 씨, 이웃집 남자, 왕 경찰관 등은 늘 덤, 잉여, 그녀의 육체를 원했다. 그래서 김치에 독을 탈 때 그녀는 그 잉여에 독을 놓는 것이다. 잉여가 저주의 몫이 되는 것이다. 특히 그녀의 독김치가 작용하는 곳은 왕 경관으로 대변되는 공안, 국가 소 권력 집단이다. 그녀의 복수는 국가로 향한다. 그녀는 헐벗은 삶, 무능력 즉 자유의 박탈 외에는 어떤 잠재성도 지니고 있지 않은 삶으로 가고 있는 듯 보였으나 세미오스피어의 변경을 보여주고 번역 행위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정적인 카메라, 장식이 없는 미장센, 판타지의 틈입이 없는 방식을 고수하다가 한 장면에서 다른 논리를 따라간다.

최순희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 이전 최순희의 아들 창호는 용이 그려진 연을 푸른색 스프레이로 뒤덮었다. 창호가 푸른색으로 색칠해나가는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자신만의 특이한 세계의 고집이고 창조다. 기차 길 옆,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최순희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 프레임 속, 기차 길 옆 사람들이 모여 있고 앰뷸런스가 보인다. 사람들은 최순희를 본다. 최순희가 그들을 본다. 앰뷸런스의 닫혔던 문이 열리고, 최순희는 슬픔과 패닉에 빠진 표정이다. 이때 최순희를 보는 시선이 최순희에 포커스 인했다가 포커스 아웃되면서 그들의 집에 맞추어진다. 망자의 시선, 죽은 창호의 시선이다. 이 소년 망자의 엄마 최순희는 연변에서 살다가 남편이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가자 북경의 외곽 지대에서 김치 행상을 하게 된다.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연변을 떠나 북경 외곽 지대에 있는 최순희는 두 번의 이주를 겪은 것이다. 한번은 그녀 부모나 더 먼 조상들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것이고, 또 중국 내에서 다시 한 번 조선족 집단 거주지를 떠난 것이다. 최순희는 창호와 이곳에서 성매매 여성들과 이웃해 지냈다. 사는 집은 온기 없이 황량하고 쥐가 출몰한다. 

나는 망자의 시선, 이러한 집을 들고나는 죽은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포착되는 엄마, 집 그것의 그러한 유령성, <망종>이 사유하는 모국, 엄마, 집의 문제가 흥미롭다. 친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낯선 것이 친숙한 것으로 동요하는 이 운동. 예컨대 이 집, 폐가는 이들의 집이 아니지만 또한 집인 것이고 망자의 시선이 엄마에게 머물다 이 집에 머문 후 떠날 때 익숙한 것의 부재와 현존(un-home-liness)의 느낌이 지극하다. 친밀한 낯섦의 깊은 동요(the deep stirring of the uncanny)라고 부를 수 있는 망자의 시선으로 포커스 인 되는 이 장면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머무르거나 소유할 수 없는 집과 소수자의 관계를 보여준다. 자리를 잡았으나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자의 시선이다. 나의 삶의 거주지로서의 세계(Oikos), 나의 존재노력으로서의 거주의 관리(Oikonomia). 이 사건이 종결되는 순간 엄마에게 부여되었다 집으로 이동하는 시선. 

엄마의 얼굴과 집이 포커스 인, 아웃되는 이 장면을 레비나스 윤리학과 영화적 재현을 가능하면 관통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레비나스는 광학으로서의 윤리학, 즉 윤리학이 존재론적 철학이라기보다는 주체와 타자의 구제적이고 다양한 관계를 조명하는 광학(optics) 혹은 영혼적 광학이라고 본다. 이때 일종의 광학으로서의 윤리학은 개요적이고 전체화 시키며 객체화하는 시각의 특성을 배제한 이미지 없는 또 다른 시각이며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도상이나 관계라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서 얼굴의 클로즈업은 유리 로트만에게 있어서는 ‘친밀함’ 과 ‘내밀함’ 이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의 관찰이라는 일상의 경험을 자동적으로 연상시킨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세계나 지극히 친밀한 세계의 특징이다. 영화는 이를 통해 모든 등장인물- 친구와 적들 -이 관객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의 친분 관계란 인물의 특징을 상세히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핏줄의 불거짐과 얼굴의 주름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매우 내밀한 관계인 것이다.” 
- 김수환, 「영화 기호학과 포토제니: 로트만의 ‘신화적 언어’개념을 중심으로」, 『문학과 영상』 208, 43쪽.

반면 엡스탱, 발라즈(Bela Balazs), 그리고 바르트(Roland Barthes)는 바로 얼굴에서 의미심장한 ‘타자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클로즈업된 인간의 얼굴, 그것은 기호학의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자족적 실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가 엡스텡을 그토록 매혹시켰던 클로즈업(그는 클로즈업을 영화의 영혼이라고 불렀다)은 발라즈의 이른바 “인상학적(physiognomic)” 영화 이론의 중심 테마이기도 했다.

이러한 클로즈업의 포커스 인과 아웃의 운동에서 아이를 잃은 소수자 여성의 얼굴은 타자성과 내밀함을 동시에 극대화한다. 이후 그녀는 자신을 경찰서에서 성폭행한 경찰관의 결혼식에 피로연 음식으로 가져간 김치에 독극물을 탄다. 그녀가 이렇게 얼굴을 잃을 때, 체면을 버릴 때 그녀의 괴물성이 생산한 중국 공안의 괴물성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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