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절>(하길종, 1973) 행정서류를 통해 본 1970년대 초 제작 전 검열절차
나는 한때 영화를 거의 포기하였다. <화분>을 연출한 후, 써낸 시나리오는 매번 제작자의 거부 반응을 받거나 칼자루를 든 관에서 나의 시나리오는 항시 보이콧을 받아왔다. 그래서 최대한도로 현실과 타협한다고 해서 만든 <수절>이란 영화는 작품의 배경이 한사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저항적이다’ ‘반사회적이다’라는 이유로 20분 길이의 필름이 무참히 커트당했고, 극장 스크린에서는 알맹이가 빠진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졌다. 나는 그때 마치 눈알과 입이 없고 팔다리 하나가 잘려나간 나의 모습을 공개하는 것 같은 큰 아픔을 느꼈고, 구토와 분노를 함께 느끼며 영화를 포기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1)
이번 편에서는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1973년 작 <수절>의 검열서류를 통해 이 시기 검열제도와 환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수절>은 한사군 시대를 배경으로, 전쟁을 하러 타지에 간 유신(하명중)을 기다리던 부인 질례(박지영)와 그녀의 딸 용분(이영옥)이 온갖 고초를 겪다 남편의 스승이자 폭군인 지거도사(윤일봉)와 그 패거리에게 강간과 죽임을 당한 후 귀신이 되어 복수를 한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10년 만에 돌아온 유신은 부인과 딸의 귀신을 만나 그녀들의 억울한 사정을 안 후 지거도사와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수절>은 미국 UCLA에서 영화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하길종이 <화분>(1971)에 이어 두 번째로 연출한 작품이다. 1970년 귀국한 하길종은 독립 제작의 어려움 끝에 겨우 데뷔작 <화분>을 완성하였으나, 이탈리아 영화 <테오라마> 표절 시비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고심 끝에 두 번째 작품 <수절>을 연출하였으나, “최대한도로 현실과 타협한다고 해서 만든” 이 영화 역시 고난의 상황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감독 본인이 무려 20분 길이의 분량을 검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영화의 검열서류를 통해 당시 한국영화 검열( 및 행정) 절차와 환경을 살펴보도록 하자. 1960년대(특히 후반) 이후 영화의 검열은 크게 제작 전 시나리오 검열과 제작 후 본편 검열로 나누어졌다. 시나리오 검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고, 1962년 제정 영화법 이래 존재했던 제작신고 절차에서 문공부가 시나리오를 검토한 후 제작상의 유의사항을 전하는 관행이 제도화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나리오 검열이 실질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했고, 1970년부터는 예륜을 통한 시나리오 검열이 독자적으로 시행되었다. 이와 함께 문공부가 주관하는 제작신고 역시 존속하였다. 그러다보니 제작 이전 검열 혹은 행정 절차는 1970년 이후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와 문공부의 제작신고로 대별된다.
특히 이 편이 주목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바, 1972년 이후 시나리오 단계에서 검열 혹은 제작신고 체제의 변화를 서류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 검열체제의 주요한 변화와 혼란은 거의 항상 시나리오 검열단계의 복잡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나리오 신청과 제작신고 단계의 절차를 영상자료원 검열서류의 일자 순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1973.6.25. 시나리오 심의 신청(화천공사->예술문화윤리위원회)
2. 1973.6.29. 시나리오 심의의견서(문화예술위원회)
3. 1973.7.3. 국산 극영화 제작권 배정신청서(화천공사->문화공보부)
4. 1973.7.9. <수절> 시나리오 심의결과 통고(예술문화윤리위원회->문화공보부)
5. 1973.7.13.(작성, 7.16일 접수) 73 2/4분기 시나리오 심사 작품 제출(화천공사->문화공보부)
6. 1973.7.20.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대한 작품 지정(문공부 내부서류)
7. 1973.7.21. 영화제작신고서(화천공사->문화공보부)
8. 1973.7.21. 우리영화 제작현황(문공부 내부서류)
9. 1973.7.24. 73.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따른 작품 지정(문화공보부->화천공사)
10. 1973.7.25. 극영화 “수절” 제작신고 수리통보(문화공보부->화천공사)
"국산극영화 제작권 배정신청서"와 "73년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따른 작품 지정"(영화 <수절>)
1970년을 거치며 체계화된 영화정책에 따르면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자는 예륜을 통해 시나리오 심의를 통과한 다음(1, 2, 4번) 이를 바탕으로 문공부에 제작신고를 진행해야 했다(7, 10번). 제작신고는 말 그대로 제작이 시작된다는 것을 정부에 신고하는 행정절차이나, 실제 문공부는 예륜과 별도로 시나리오를 심의하곤 하여 시나리오 단계의 이중검열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런데 앞의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두 단계에 별도로 제작사에 대한 제작쿼터(제작권) 부여 단계가 추가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서류에도 이 절차에 따른 변화가 나타난다. 볼드체로 표시한 부분이 71년까지 존재하지 않던 서류들이다.(3, 5, 6, 8, 9번)
제작사 별로 양적인 제작권을 부여하는 방식(연간 00편, 분기별 0편 등)과 달리, 개별영화에 대한 심사를 거쳐 제작사에 제작권을 배정하는 절차는 국가비상사태 이후 권위주의 정권의 영화검열 강화를 위해 신설된 것이다. 1972년에는 이 제작권 배정을 위해 영화계 안팎의 권위자 20명 내외가 예륜의 심의 이후 별개로 문공부 촉탁으로 참여하여 시나리오를 검토하게 하였는데, 이는 실질적인 검열의 과정이었다. 그 결과 1972년 신규 제작의 부진으로 이어졌고, 이를 감안 1973년 영화시책을 통해 문공부가 직접 결정하기로 했다는 점은 전편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1973년 실질적인 검열이 아닌 형식적 행정절차로 전락한 이 제작권 배정절차가 절차의 번거로움을 강화하는 외에 어떤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는지 의문시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73년 들어 예륜의 심의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영화 제작현황(1973.7.21)(<수절>)
그럼에도 이 절차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영화법 개정 이후 새롭게 허가받은 12개 사의 제작내역을 미리 점검함과 동시에 통제하는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인적(생산주체) 통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8번 “우리영화 제작현황”이라는 양식은 다소 흥미롭다. 제작신고가 접수된 날 작성된 이 양식은 본편 검열예정일, 상영예정일과 극장, 촬영 일정까지 적시되었다. 국가가 영화의 제작 및 상영일정과 개봉관, 주조연 배우까지 관리하는 이러한 상황은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압박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수절>의 주요 검열사항 검토
이제 이 영화의 주요 검열 사항에 대해 살펴보자. 1973년 영화시책이 밝히고 있듯이 73년부터 예륜에 의한 시나리오 검열이 강화되었다. 당시 영진공의 기관지 『영화』의 한 기사에 따르면, 1973년 6월부터 11월까지 시나리오 심의를 마친 작품 53편의 경우 반려가 11편, 전면개작이 6편, 개작이 9편, 수정통과가 26편이며 수정이 되지 않고 초심에서 통과된 작품은 단 1편 뿐이었다.2) 그렇다면 <수절>의 시나리오 검열은 어떠했을까? 이 영화에 대해 예륜은 13개의 사항을 지적했고, 재심 판정을 내리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53편 중 26편에 해당하는 “수정통과” 작품 중 하나였던 셈이다. 13개 내역 중 자구나 사실관계 수정 정도에 해당하는 사항이 5개, 잔혹성 지적이 4개, 외설성 지적이 1개, 고증 유의 1개, 사유 불명 2개 등이다. 항목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당시 반 이상의 작품들이 반려나, 개작을 통한 재심 및 삼심까지 이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검열이 심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수절> 시나리오 검열 수정지시 사항 13개
영화 촬영 후 촬영본 본편에 대한 검열은 11월 14일에 신청되었다. 첨부된 문서 중 “영화배급신청서 접수필증”(11월 17일자)이 눈에 띈다. 제작사인 화천공사가 한국영화배급협회(이사장 김태수)로부터 발급받은 접수필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4차 개정 영화법 이후 영화배급의 전국 일원화를 목표로 설립된 영화배급협회가 관련된 행정절차의 흔적을 보여준다.
<수절>의 본편 검열은 1973년 11월 17일에 진행되었다. 당시 영화 본편의 검열은 문화공보부, 중앙정보부, 내무부(치안국) 3개 기관이 주관하였다. 순전히 공무원 중심의 검열체제였다. 중앙정보부는 국가 안보사항, 내무부 치안국은 미성년자 관람가부를 중심으로 보았고, 문화공보부가 전체 검열사항을 종합하여 의견을 내는 것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위 중앙정보부 검열관의 검열사항은 4개에 불과한데, 최종적으로 문화공보부가 지시한 검열사항은 9개처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문화공보부의 추가 검열사항이 부가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문화공보부가 중앙정보부나 내무부 치안국의 검열사항을 취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종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문화공보부가 최종적으로 통보한 9개처의 검열사항은 대사삭제 2개처(“상납할까요”, “돈과 권력이면 전부지” 등), 화면삭제 4개처(강간 장면 2개처 등), 화면단축 3개처(나체로 춤추는 여자들과 이를 보는 질례의 얼굴 등)이다.
<수절> 본편 검열 수정사항
시나리오 단계의 엄격한 검열을 거친 후,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본편 완성본의 경우 검열되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당시 관행을 감안할 때, 9개처에 달하는 이 영화의 본편 검열 분량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며 꽤 심각한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항적이다’ ‘반사회적이다’라는 이유로 20분 길이의 필름이 무참히 커트당했”다는 감독의 주장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하자. 우선 검열서류 상 절제된 이후의 총 분량은 96분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검열되지 않은 원본으로 추정되는(실제 서류상 검열사항이 모두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오리지널 네거티브(ON) 원본을 변환하여 서비스 중인 동영상의 러닝타임은 1시간 32분 28초(93분 28초)가량이다. 오히려 원본이 짧은데, 영상자료원 버전에 크레딧롤이 빠져있어 발생한 결과로 보인다. 크레딧롤이 길어야 3-4분임을 감안할 때 검열의 분량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20분가량 “커트”됐다는 감독의 회고는 다소간의 과장이거나, 시나리오 검열 단계까지 언급한 것이거나, 공식적인 서류에서가 아니라 막후에서 조정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하나의 주제로 “저항적” 혹은 “반사회적”이라는 면에서 검열당했다는 감독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사 2개에 대한 검열 근거는 저항적이거나 반사회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직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나머지 7개 처 외면상 잔혹이나 신체 노출 등의 이유로 절제된 것으로 보이는 장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데 있다. 관습적인 의미에서라면, 감독의 자의식에 찬 주장과 달리 이 절제된 장면들이 “저항적”이라거나 “반사회적”이라 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장면들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충분히 저항적이거나 반사회적이라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다. 우선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권력에 대한 비판을 목표로 진행된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사실 <수절>은 과도한 실험성과 다소 미숙한 촬영이나 편집, 개연성 없는 인물간의 관계 설정, 앞뒤 안 맞는 서사 등이 난삽하게 흐트러져 전체적으로 잘 조율된 작품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는 감독의 전작 <화분>에서 역시 마찬가지지만, 어찌된 일인지 <화분>에 비해 그 문제가 두드러져 보인다. 본인이 익숙하지 않은, 당대 유행하던 검술영화라는 장르적 외피 속에 자신의 메시지와 실험정신을 새기고자 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영화는 사실 과할 정도로 당대 권력자의 횡포와 피수탈자의 고난(유신의 부인과 딸) 장면들을 강조 내지 나열하고 있고, 이는 앞서 언급한 영화의 단점들과 어우러져 영화를 매우 보기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이를 영화적 실패로 볼 수도, 당대 상업 주류 영화들이 도외시한 영화적 실험의 성취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평가가 어떠하건, 이 영화가 유신 이후 강화되어가던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 역사무협극을 경유하여 권력 일반의 폭력에 대한 매우 노골적인 고발의 의지를 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화에서 절제된 외설적이거나 잔혹한 장면들은 대개 권력자들의 횡포와 폭력을 가시화하는 사례들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장면들이 직간접적으로 비판적이거나 반사회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보겠다.
영화 <수절>의 한 장면
또한 박정희 정권기, 특히 유신 이후의 권위주의 정권기에서 높은 수준의 섹슈얼리티나 잔혹함, 혹은 사회적 일탈행위의 재현 일반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면이나 글의 성격상 이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는 없겠으나, 당시 권위주의 정권이 국민에게 요구했던 절제와 질서, 미풍과 양속의 덕목들, 그리고 그러한 덕목의 강화를 통해 현행 권력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과도한 잔혹성과 퇴폐, 섹슈얼리티, 일탈은 도구적 이성을 넘어서는 정동과 개인적 욕망들의 분출을 표방함으로써 권력의 체제에 구멍을 뚫고 탈주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무)의식적 의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각주
1) 하길종, "신문 광고와 바보의 초상", 한국영상자료원, 『하길종 전집1, 태를 위한 과거분사, 백마 타고 온 또또』, 2009, 263-264쪽
2) “양질의 작품 빈곤: 시나리오”,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12월호, 33-34쪽
※ 본 게시물에는 작성자(필자)의 요청에 의해 복사, 마우스 드래그, 오른쪽 버튼 클릭 등 일부 기능 사용이 제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