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말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영화정책의 급변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영화검열 체제는 매우 복잡한 변화를 겪었다. 이 변화는 주로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검열(외화의 경우 수입 허가 단계)에 집중되었다. 이중검열 혹은 삼중검열의 혼란을 낳은 60년대 후반 시나리오 검열은 1970년에 이르러 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적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변화와 혼란의 시발은 1971년 12월 갑작스럽게 선포된 국가비상사태였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12월 6일, ‘중공’의 유엔 가입으로 안보가 더 불안해졌고, ‘북괴’의 도발이 날로 격화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히 만전의 안보 태세를 확립한다, 2.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또 불안요인을 배제한다, 3.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 논의를 삼가야 한다” 등 6개항 조치를 발표했다. 그리고 12월 11일 문화공보부는 국가비상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영화 분야에 다음과 같은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1. 협동단결을 강조하고 성실, 근면, 검소한 생활자세를 바탕으로 하는 국민상을 그린 내용의 영화제작을 권장한다.
2. 건전한 국민정서로 순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의 영화, 민족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의 영화를 정선, 수입하도록 한다.
3. 국내영화제작의 질적 향상을 위해 72년도 제작편수를 1백50편으로 한정하고 안보관계 영화를 연 30편 이상 제작하여 매월 최소한 2편 이상 상영토록 의무화한다. 72년도 외화수입을 50편으로 한정하되 안보관계 영화를 15편 정도 수입하도록 한다.
4. 음란, 선정적인 묘사 등 퇴폐성향이 있는 내용,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내용, 사치와 낭비 등 소비성향을 조장할 우려가 있는 내용은 배격한다.1)
국가비상사태 선포 내용을 담은 일간지 기사(『동아일보』, 1971년 12월 6일)
이러한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영화시책”은 안보 위기 상황을 맞아 그간 “섹스 퇴폐풍조 눈물 한숨 패배의식 등을 철저히 규제”2)함으로써 한국영화를 수정하겠다는 정책당국의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 체제 이후 1972년 신년부터 검열이 강화되었는데, 이를 단순히 강화되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간 진행되었던 시나리오의 검열은 신청된 시나리오를 심사하여 무수정, 개작, 부분 개작, 반려 등의 단계에 따라 절차가 진행된 반면, 새로운 체제에서는 신청된 시나리오를 심사하여 제작될 수 있는(외화의 경우 수입할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검열의 수준을 벗어나는 조치다. 왜냐하면 기존 우리가 생각하는 검열은 주어진 작품에 대한 수정과 (예외적으로) 반려를 포함하는 것이지, 제작할 작품을 선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어느 면에서는 최고 수준의 검열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에 따라 시나리오 단계의 검열 과정은 60년대 후반에 이어 다시 이중화된다.
이에 당시 문공부 장관 윤주영은 “저질영화 제작과 무분별한 외국영화 수입을 막고, 국가 안보 우선의 영화제작 장려책으로” 제도를 바꾸었다고 밝혔다.3) 문제는 시나리오 심사에서 통과한다 하더라도 제작쿼터를 부여받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었다. 즉 문공부는 예륜에서 사전심의한 작품에 대해 20인의 “쿼터” 심의위원을 두어 재심사 과정을 거친 후 국산영화 제작권을 부여했다. 그 결과 1972년의 한 글에 따르면 320여 편의 시나리오 가운데 1백 50편이 제작쿼터를 부여받았고, 최종적으로는 29편만이 영화화되었다고 언급된다.4)
물론 이는 감독들의 대담 가운데 나온 발언이라 수치가 정확한지 확인할 수 없고, 1972년의 한국영화제작편수가 29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후술하겠지만 영화진흥공사 자료집의 통계는 이 해 제작된 편수가 122편이라 밝힌다). 1971년으로부터 넘어온 제작쿼터가 상당수 존재했기 때문이다.5) 아마도 1972년에 부여된 제작쿼터의 상당량은 다시 1973년으로 이월되기도 했을 것이다. 제작쿼터가 부여되었음에도 제작이 부진했던 이유에 대해 앞의 잡지기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해당 연도인 72년도 배정 코타분의 제작 진척이 극히 부진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영화계의 전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당해연도의 「코타」가 과년도 「코타」에 비해 제작완성율이 뒤떨어진다는 상례에 비유하기에 앞서 최근의 영화산업이 사양의 문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세계적인 조류의 축소판으로 풀이할 수밖에 없겠다. 또한 예로는 「선각본 심사제」라는 큰 변화가 처음으로 실시됨에 따라 제작에서 다소 주춤했던 제작자들의 태도도 영향의 일부로 볼 수 있겠다.6)
1970년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산업의 부진이 급격히 진행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관객수의 경우 1969년까지는 1.71억명에서 1.73억명으로 소폭이나마 증가하였으나, 1971년 처음으로 1.46억명으로 2천만명이 줄었고, 1972년에는 1.18억명으로 거의 3천만명이 줄어들게 된다. 제작편수는 1969년 229편을 정점으로 1971년 202편으로 줄었다가 1972년 122편으로 급감하였다. 말하자면 1970년 시작된 불황은 1972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다. 그리고 그 원인 중 하나가 어쩌면 1971년 국가비상사태 선언 이후 강경해진 영화정책 변화일 수 있을 것이다.
유신과 4차 개정 영화법
이러한 상황에서 1972년 10월 말 다시 유신이 선포되었다. 유신과 함께 1972년 검열체제는 더욱 강화된다. 특히 유신 체제 하 예륜은 새로운 18개의 심의기준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기존의 검열사항 외 “1.10월유신 조치를 왜곡, 비방하거나 유인비어 날조를 유발할 우려가 있는 내용, 2.총력안보에 역행하거나 국토 통일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 3.남북적십자 회담을 비방하거나 이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 등 사항이 눈에 띈다.7)
1973년 2월에는 영화법이 개정, 4차 영화법이 공포되었다. 4차 개정 영화법은 70년 3차 개정영화법이 시행했던 제작과 수입의 분리 정책을 이전으로 되돌려 제작사만이 외화수입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한국영화 제작사의 독점적 권리를 보장했다. 또한 제작사 등록제를 허가제로 강화하여 마찬가지로 제작사를 독점화했다. 표면적으로 이는 60년대 내내 추진되었던 영화정책의 중점 방향인 메이저 기업화 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메이저 기업화 정책이 이미 파탄의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고 정부의 권위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소수의 제작-수입사를 통해 영화콘텐츠 전반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짐작된다. 이와 함께 기존의 영화진흥조합은 영화진흥공사로 개편되었다.
광의의 검열 행정체제와 관련하여 사단법인 한국영화배급협회의 창립을 별도로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배급협회는 1973년 5월 11일 창립총회를 통해 발족했다. 지방배급사(흥행사)의 부당한 간섭과 영화 수입의 누출을 막고 전국적으로 일원화된 배급체제를 구축하고자 설립된 배급협회의 초대 이사장은 김태수, 상임이사는 안재홍이었고, 이사진으로는 제작(수입)사 쪽 2명, 공연자 쪽 2명, 영화진흥공사 1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영화배급협회는 중간배급업자(지방흥행사)를 배제함으로써 중간 유출되는 수입을 줄이고, 제작자와 상영자라는 직접 이해당사자간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8) 이에 따라 문화공보부는 “①모든 영화는 영화배급협회 이외의 경로를 통하여 배급하지 못한다. ②영화의 배급에 관하여 임의로 계약하여 이를 위장해서는 안된다. ③모든 공연장은 배급협회를 통하지 아니한 여하한 극영화도 상영해서는 안된다. ④ 영화배급신청서는 제작신고 및 수입추천 시에 영화배급협회에 제출해야 한다”9) 등 배급협회에 관한 행정방침을 시달하여, 모든 영화의 배급은 배급협회를 거치도록 강제했다.
1973년 6월 21일 진행된 영화배급협회 현판식 사진(김태수 배급협회 이사장(좌), 문공부 이치순 예술국장(우) 출처: 『영화』, 1973년 8월호)
이와 함께 매년 영화정책의 구체안을 포함한 영화시책이 1973년 이후 1989년까지 매년 발표되었는데, 4차 개정 영화법이 공포된 1973년 영화시책은 영화검열의 내용과 체제에 있어서 강화된 안을 담고 있다.10) 우선 우수영화 제작방침에서 “10월유신을 구현하는 내용,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애족의 국민성을 고무 진작시킬 수 있는 내용, 의욕과 신념에 찬 진취적인 국민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내용, 새마을 운동에 적극 참여케 하는 내용, 협동·단결을 강조하고 슬기롭고 의지에 찬 인간상록수를 소재로 한 내용” 등 유신 이후의 변화된 상황을 담았고, 우수외화의 기준으로 “유신이념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영화, 민족주체성과 애국, 애족정신을 북돋아줄 수 있는 영화, 새마을운동의 가치관을 설득시킬 수 있는 영화” 등 유사한 기조의 15개 항이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검열에 있어서의 주안점 역시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거나 국민총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의 지양, 음란 선동적인 묘사 등 퇴폐성향이 짙은 내용의 지양” 등 6개 항이 별도로 제시되었다.
한편 전년 크게 문제가 되었던 시나리오의 심의는 “예륜 심의를 거쳐 다시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된 심의회에서 심의 결정하던 것을 예륜 심의를 강화하여 당부가 직접 결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1972년의 번거로웠던 시나리오 검열의 단계, 그리고 이로 인한 제작 부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개선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의 변경이 반드시 소위 이중검열의 폐단을 개선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문공부 담당자의 직접 결정은 양면의 날과 같아서, 강화의 기조에서는 매우 엄격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제작권은 1972년 제작편수의 급감을 의식한 탓인지 전년 150편에서 130편으로 줄었다.
요컨대 1971년 말 선포된 “국가비상사태선언” 이후 진행된 영화정책은 4차개정영화법까지 권위주의 강화를 향해 치달았다. 단순히 영화검열만의 문제는 아니다. 60년대 영화산업정책의 폐단이 4차개정영화법을 거치며 반복강화되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바로 이 시기에 영화산업의 불황이 시작되었다. 산업적 불황과 정권의 권력유지 욕망의 산물로서의 영화정책이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며 1990년대 초까지 한국영화산업의 장기불황이 진행된다.
각주
1) "안보 우선 주체의식 고취, 대중연예에 새 기풍, 문공부서 쇄신책 마련, 영화검열 기준강화, 제작편수를 연 1백50편으로 한정", <매일경제신문> 1971년 12월 11일
2) "줄지을 「안보영화」, 국민총화 담긴 외화 우선 수입, 사회불안·섹스 등 다룬 작품 철저 규제, 방화도 새 가치관 따라서 개작", <동아일보>, 1972년 1월 12일
3) "「선심사」 「후 수입쿼터배정」, 윤문공 안보 우선의 영화정책 마련", <조선일보>, 1972년 4월 14일
4) “신춘좌담: 바람직한 새해 영화풍토는”, 『코리아시네마』, 1973년 1월호, 46-47쪽
5) 당시 한 잡지의 다른 기사에 따르면 1972년 11월 14일 현재 시점에서 1971년 이월쿼터 73편 중 63편이 검열을 끝냈고, 72년도의 경우 93편이 제작신고 된 가운데 29편이 검열을 필했다. “72년도 국산영화 개황, 「건전」 「우수」로 경향 바꿔져”, 영화진흥조합, 『코리아시네마』, 1972년 12월호, 39쪽
6) 앞의 기사, 39쪽
7) “뉴스토픽, 「문화유신」을 다짐, 연예계 인사 간담회에서, 예륜 18항의 새 심의기준 발표”, 영화진흥조합, 『코리아시네마』, 1972년 12월호, 57쪽
8) “배급협회 발족: 영화계 숙원인 배급 일원화 위해”,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7월호, 73쪽
9) “[알아둡시다] 영화배급에 관한 행정지침을 시달”,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8월호, 67쪽
10) 이하 영화시책 내용은 “영화시책”, 영화진흥공사 편, 『한국영화자료편람』, 1977, 225-227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