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극 출신의 '작은 거인' 황해

by.김종원(영화사연구자) 2020-04-02


<성벽을 뚫고>의 육군 하사로 시작

1미터 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황해(黃海)가 극장 화면에 처음 얼굴을 비친 것은 1949년 한형모 감독의 데뷔작 <성벽을 뚫고>(김보철프로덕션 제작)부터였다. 이 영화는 해방 후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을 배경으로, 육군 소위(이집길)인 처남과 공산주의자(권영팔)인 매부 사이에 벌어지는 이념의 갈등과 반목을 그린 것이다.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 하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려 하지만 실패하자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황해는 이 작품에 조연급인 육군 하사 역으로 출연했다. 남북 분단이 가져온 동족상잔의 비애를 담은 최초의 영화였다.  
 
[사진]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서의 황해

이렇게 영화계에 나왔으나 황해는 한동안 후속 출연작을 내지 못했다. 6.25전쟁과 연극 때문이었다. 그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한 것은 ‘뚱뚱이 양훈’과 겨룬 코미디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이었다. 이후 <나는 고발한다>(김묵, 1959)를 비롯한 <안개 낀 서귀포>(임한림, 1959), <햇빛 쏟아지는 벌판>, (정창화, 1960),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폭력지대>(김묵, 1965),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 등 액션물과 <한많은 청춘>(권영순, 1958), <자장가>(하한수, 1958), <목포의 눈물>(하한수, 1958), <울지 마라 두 남매>(서석주, 1960),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 등 신파 멜로, <박서방>(강대진, 1960), <마부>(강대진, 1961) 등의 서민영화,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 <심봤다>(정진우, 1979) 등 문예영화에 출연했다.
 
[사진] <자장가>(하한수, 1958)의 황해. 왼쪽은 배우 한미나(사진제공: 김종원)

황해가 <자장가> 유의 신파와 액션 연기에 강한 것은 일찍이 악극단 등에서 쌓은 15년 경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버라이어티 쇼적 재능과 과장된 표정연기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차츰 탈색돼 69년 <독짓는 늙은이>를 계기로 내적 연소의 연기양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단지>(이원세, 1975), <부초(浮草)>(이한욱, 1978)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장의 한계 극복한 무대 경험

황해는 1920년 3월 6일 동해의 푸른 물을 끼고 뒤쪽으로는 외금강 줄기가 뻗어나간 강원도 고성군 장전읍 경동(京洞)에서 태어났다. 정어리 기름공장을 경영하는 전병근(全炳根)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과 네 살 터울인 그에게 홍구(弘玖)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큰 아버지 댁에 보내 주교(舟橋)국민학교를 다니게 했다. 졸업 후 경신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3년제인 경성상공업 기계과에 들어갔다. 졸업(1936년) 후에는 미쓰비시(三菱)백화점 식료품 점원을 거쳐 중앙우체국 집배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집배원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변두리 로 나설 때면 무료를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동료들 사이에서 ‘노래하는 집배원’으로 통했다. 하지만 이 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형과 함께 아버지가 하는 정어리 가공 일을 도왔다. 
 
[사진]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에서 황해와 윤정희

그런데 이 무렵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 열여덟 살 되는 해 봄이었다. 서울의 성보(城寶)악극단이 전국순회 공연 중에 이 고장을 찾아온 것이다. 악극단은 관객동원의 수단으로 공연 첫날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는데, 홍구 청년도 참가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한 여단원이 소질이 있으니 서울에 가서 가수의 길을 걸어보라고 권했다. 그녀가 바로 ‘성보의 간판스타’인 가수 신 카나리아였다. 이에 용기를 얻어 성보악극단의 연구생 모집광고를 보고 응모, 1천 2백여 명의 경쟁자 가운데 12명을 뽑는 성보악극단의 제1기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들어간 극단에서 처음 출연하게 된 것이 신 카나리아 주연의 <춘풍일가>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는 공연 때마다 객석에 나와 다른 배우들이 하는 동작이나 대사, 표정을 관찰하고, 화장술을 익혔다. 그런 열성 탓인지 그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지방공연의 주연 배우로 발탁되었다. 지방공연은 밤차에서 새우잠을 자는 등 고달픈 일이었지만 무대에 서기만 하면 신명이 났다. 이렇게 시작한 연극이 1938년부터 4년 동안 10여 편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 카나리아의 부군인 김화랑이 제일악극단을 조직하자 성보악극단을 떠났다. 2차세계대전으로 해초 가루로 만든 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그는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제일악극단에 머물렀다. 그런데 계속 조여 오는 징용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천진에 내리자 미리 와있던 신 카나리아, 박단마 등과 함께 손목인이 이끄는 신태양악극단에 입단했다. 백파진(白波進)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사진] <인간단지>(이원세, 1975)에서의 황해(사진제공: 김종원)


군예대원으로 아내와 평양까지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잠시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으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6월 그는 간절히 기다리던 귀국선에 오르게 된다. 인천항에 내린 그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토록 그리던 황해 바다, 밟고 싶던 조국의 땅이 아닌가. 그는 “한국남자는 황해 바다처럼 넓고 거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던 한 광복군 노인의 충고를 떠올리며 예명을 다시 황해(黃海)로 바꾸었다.
(황해, 「藝에 살다(13) 최초의 액션 스타(13)」, ≪일간스포츠≫, 1979년 11월 7일자) 

이렇게 3년 만에 서울 돈암동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신 카나리아 부부가 만든 새별악극단에 가담했다. 이 무렵 <자유만세>(1946)를 찍은 한형모(韓瀅模) 촬영기사가 만나자는 기별을 보내 왔다. 이번에 <성벽을 뚫고>라는 영화로 ‘입봉’하게 되었는데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해는 이렇게 하고 싶었던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연극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새별악극단을 인수하고 전성기로 올려놓을 무렵 가수 백설희(白雪姬)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자 동거생활을 결행하였다. 그들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살림을 꾸린지 15년 만인 1960년 서대문 밖 백련사(白蓮寺)에서였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며 아내와 함께 군예대(軍藝隊)에 들어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사진] <부초>(이한욱, 1978)에서의 황해와 윤세라(오른쪽)(사진제공: 김종원)

배우로서는 불리한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승부욕으로 관객 앞에 다가선 ‘작은 거인’ 황해는 1965년 장동휘, 허장강과 함께 동인프로덕션을 설립, 파월장병의 용맹상을 그린 <맹호작전>(1965)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2월 9일 슬하에 노래하는 배우 전영록을 남기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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