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마땅한 일거리가 부족했던 시기 우연히 시작하게 된 조명 일은 그저 공연이 있을 때나 돈을 받는 불안정한 일자리였지만 영화가 번성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고 영화와 광고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동하는 천직이 되었다.
그는 1930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지주계급이던 부모님 슬하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무렵, 집안이 몰락하고 가족들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어렵게 어머니와 생활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진하는 연합군이 평북을 점령할 당시 그는 치안대에 가담하여 전쟁 속의 전쟁을 겪었다. 전세가 바뀌고 연합군이 남하하던 때에, 그는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 들어오면 되니 먼저 가라"는 말이 어머니와의 안타까운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월남하여 가족을 잃은 그가 처가 식구들을 각별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피난길에 우연히 형을 만나 함께 남하하던 중 연고가 없는 두 형제에게 미군 부대의 노무자로 차출되는 행운이 찾아온다. 미군부대에서의 안전한 생활과 넘쳐나는 물자는 그들에게 커다란 매혹이었고 계속 머무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나 휴전이 이루어진 후 미군부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자 사회로 나와 일을 찾아야 했고, 그러던 중 주변의 추천으로 시공관의 조명을 담당하고 있던 서영훈을 만나게 되면서 조명 일을 시작하게 된다.
<뇌우>와 같은 무대연극이나 무용공연 등의 조명을 담당했는데 1950년대 중반의 조명 사정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탄소봉으로 플러스 마이너스 전극효과를 내 방전시키며 빛을 방사하는 카본아크라이트를 사용했는데 손으로 탄소봉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시키는 게 관건이었다. 심지어 시력에 좋지 않아 젤라틴을 씌우고 작업해야돼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감으로만 작업해야 했다.
박진수: 무대조명이라는 것이, 아크라이트라는 것이 뭐이냐면 스포트 쏘는 거 있잖아. 카봉을 태우는 거야. 카봉을 이제 손으로 태워요, 양쪽으로 불을 합선시켜서 태우는 거야. 손으로 조절해가지고. 옛날에는 영사기에도 전부 다 아크로 태웠다고. 이제 그것이 발전이 되면서 전구로 다 바뀌었지.1
승압효과를 내는 디머는 소금을 탄 물독 속으로 철판을 담궈 사용했다. 삼각형으로 된 철판에 전극을 연결해 서서히 담궜다 뺐다 하며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조명효과를 냈던 것이다.
박진수: 데이꼬가 뭐냐면 승압기, 10볼트에서 100까지 올리는 거야. 이것이 그때 당시 기계가 없었다고. 이걸 뭘로 하느냐. 소금물을 이만한 큰 독에다가 소금물을 탄다고. 소금물을 막 타고 좀 조그맣게 철판을, 구리 철판을 요렇게 잘라요. 요렇게해서 삼각형으로 해개지고 이걸 전기에다가 마이나스 프라스를 두 개를 만들어 가지고 싹 넣게 되면 10볼트에서 100볼트로 올라가는 거야. 하나는 담궈놓고, 마이나스 플라스니까. 플라스도 담궈야되니까. 담그면서 천천히 넣게 되면 천천히 밝아지는 거지. 빨리 담그게 되면 확 올라가니까. 영화에서도 이걸 썼어요. 영화에서도 아침, 새벽에서 아침 넘어오는 과정이라든가 또 해가 진다는 과정을 이걸 많이 썼다고. 그런 식으로 지금은 하래도 못 할 거야. 2
1950년대 중반 영화가 흥하게 되자 어두운 실내에서 벗어나 야외로 나가자는 생각에 서영훈과 함께 영화조명, 기술계의 원로인 김성춘의 문하로 들어가게 된다.
김홍 감독의 1955년 작 <자유전선>(김홍, 1955)의 조명보로 처음 영화작업에 참여한 후 <포화속의 십자가>(이용민, 1956) 등 연이어 김성춘에게 들어오는 작품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계에 눌러앉게 되었다. 물론 엄격한 김성춘의 조수로 버텨내는 게 힘들어 때로 짐을 싸기도 했지만 꾸준한 노력을 통해 김성춘의 제1조수로,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조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박진수: 그게(영화 <자유전선>) 얼마 걸렸냐면 한 6개월 걸렸어. 군사영환데 화천인가 가서 했는데. 거기서 그 작품이 한 작품 끝났어. 그 다음에 한 게 <포화속의 십자가>라는 군사영화를 지리산, 지리산에서 <포화속의 십자가>란 영화를 가지고 남원으로 내려갔다고. 이용민 감독, 촬영기사가 임병호 씨 조명은 김성춘 씨가 해서 우리가 다 내려갔는데 그때만 해도 멤버가 굉장했지. 내려가서 한 달, 두 달, 두 달 반 동안 해도 작품이 못 끝났어요. 하다보니까 돈들이 떨어져 개지고 작품이 중단이 됐어. 그래서 중간에 서울로 다 올라왔다고, 카메라 다 잽혀놓고서. 올라왔다가 한 7, 8개월 있었나? 그러다 또 내려간다 이거야. 남원서 내려가가지고 그 작품을 완성시켜 개지고 올라왔지. 남원에서 <피아골>(이강천, 1955)하고 우리가 <포화속의 십자가>를 했어. 지리산에서. 그 지리산에는 그때만 해도 빨치산들이 많았다고. 그러니까 우리 촬영을 나가게 되면은 경찰들이 호위를 했어요. 그 정도로 그때 당시 위험했어요, 빨치산이. 3
[사진 1] 영화 <포화속의 십자가>(이용민, 1956)의 한 장면
당시 견고한 도제체제로 인해 1950년대 후반 김성춘 조명감독의 작품을 도맡아 했지만 좀처럼 조명기사로 데뷔하기는 힘들었다. 한국연예주식회사에서 주로 작업한 임병호 촬영기사의 아이디어로 김성춘이 배상해야 할 전구값 100만 원 대신 그가 작품을 맡는 것으로 협상하여 1959년 김화랑 감독의 <태양의 거리>로 조명기사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한국연예주식회사와 극동흥업에서 함께 작업하게 된 김기덕, 변인집과 연출, 촬영, 조명 팀을 이뤄 충무로에서 소문난 팀으로 활동하게 된다.
[사진 2] 영화 <태양의 거리>(민경식, 1952)의 한 장면
기사로 데뷔한 뒤 한국연예주식회사가 제작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조명을 맡으며 실력을 인정받아가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60년 4.19가 나기 직전 임화수가 삼성촬영소를 인수하고 외국의 스튜디오를 참고하여 영화사를 확장한 뒤 전속제도를 두려던 시기에 그 또한 당시 최고의 조건으로 임화수와 전속계약을 하게 된다.
박진수: 나한테 제일 좋은 찬스가 한번 찾아왔드랬다고. 그때 임화수가 화양동에 삼성촬영소라는 것을 샀어, 인수맡았어. 그래서 임화수 씨가 한번 오라그래서 갔더니 ‘앞으로 거기에 대한 조명을 너 다 책임지고 너 나하고 전속계약을 맺자.’ 이래개지고 전속계약을 거의 맺었어. 한 달에 월급 얼마, 조수 얼마, 삼성촬영소에 들어오는 작품은 니가 다 맡아서 하고 라이트 관리를 니가 다 해달라. 이런 식으로 해서 나하고 전속계약을 맺었다고. 마쳤는데 마치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4.19가 터진 거야. 계약금 내가 그때 돈 100만 원을 받아 가지고 두 작품에 작품 당 30만 원씩 하고 그 기자재 40만 원을 해서 100만 원을 딱 받았다고. 4월 18일 날에. 그때 내가 얼만큼 좋았냐면 내 한달 월급이 40만 원씩 책정을 했다고. 40만 원이면 지금 돈 한 4천만 원 가까이 될 거야. 엄청 컸다고. 딱 받자마자 동대문 창신동의 한일은행인가 그랬을거야. 거길 가서 그걸 찾았어. 그때 당시에 임화수 당좌수표는 현찰 보증수표하고 똑같아요. 가서 100만 원 딱 찾아가지고 이제 집에 왔어. 그 다음날. 그러니까 4.19가 터지니까 당좌수표 정지가 돼놨어. 4
임화수가 몰락하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한국연예주식회사의 멤버들이 참여한 극동흥업으로 옮겨가 극동흥업의 전속 조명기사로 일하게 된다.
극동흥업의 첫 작품 <이복형제>(김화랑, 1961)에 참여했을 때는 제작비가 없어 흥행한 뒤 갚는 식으로 진행했는데 다행히 흥행에 성공했고 연이은 작품들의 성과도 좋았다.
박진수: 극동에서 세 작품 짼가 네 작품 짼가 김기덕 감독이 하는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고. 김포에 마석이라는데 해병사령부가 있었는데 거기 가서 <5인의 해병>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찍었어요. 모심을 때 드갔다가 한 6개월 이상 걸렸나봐. 모 벼갈이 할 때 나왔어. <5인의 해병>을 종결 했는데 그것이 히트를 쳤잖아. <5인의 해병>이 히트를 처가지고 돈을 좀 번 거야. 그러니까 극동은 하기만 하면 돈 버는 거야.
[사진 3] 영화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의 한 장면
그러다 한번은 <노란 샤쓰입은 사나이>(엄심호, 1962) 그거를 계획을 했는데 주연을 한명숙 씨를 가수를 주연을 쓰자. 며칠 찍고 나서 라슈를 딱 보니까 얼굴이 아니야. 이거 갈아야 된다. 그 논란이 많았어요. 차태진 씨는 "안된다 이건 갈아야 된다." 그러고 우리 스탭들은 "그냥 찍자." 그래서 찍었잖아요. 연기력은 아주 없어요. 타이틀이 노래로서는 히트 쳤기 때문에 그걸 만드는 건데. 그것도 하니까 흥행이 잘됐다고. 5
[사진 4] 영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엄심호, 1962)의 포스터
극동에서 김기덕 감독과 변인집 촬영감독과 함께 충무로에서 부러워하는 단짝이었던 그는 극동과 체인을 맺은 조선일보의 아카데미극장 사람들과 교류하며 친선을 맺기도 했다.
박진수: 조선일보사에서 아카데미극장을 지은게 있다고 광화문에다가. 극동에서 하는 작품은 전부 다 아카데미에다 붙이기로 체인을 맺었다고. 그 당시에 조선일보 사, 아카데미 사장이 방우영 씨라고 거기다 붙이면 잘되는 거예요. 나중에 극동하고 아카데미하고 자매결연 맺어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임 갖고 술 먹으러도 많이 대니고 낚시도 같이 다니고. 극동이 돈을 많이 벌었어. 6
연이어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하자 극동영화사의 차태진 대표는 무리한 도전을 감행해 영화사를 위험에 빠뜨렸다.
박진수: 극동영화사 차태진 씨가 대만을 갔다오더니 “야 지금 심상복 서커스단이 중국에서 보니까 뭐 곰이 트럼펫으로 노란 샤쓰를 부른다.” 뭐 하여튼 그런 희한한 걸 보고 와 가지고 그걸 수입한다 그거야, 한국에다. 우리는 말렸다고 전부 다. …(중략)… 들여왔는데 그게 이제 동물들이 코끼리, 곰 뭐 이런 동물들이 많으니까 이제 배로 싣고 와서 부산에서 하역을 하는 과정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빠져죽었어. …(중략)… 창경원에다가 서커스단을 했다고. 했는데 그때 당시에 망하게 되려니깐 장충체육관에서 아이스쇼가 들어왔어. 그거하고 딱 맞붙은거야. 손님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중략)… 동물 사육해야지 그 사람들 먹여야지. 돈이 부지기수로 들어가는데 못 당하는 거야. 그때 당시에, 그 낭중에 차태진 씨 사모님이 얘기하기를 “처음에 영화할 땐 돈을 주체를 못 하도록 벌었는데 심상복 서커스단 들어와서 다 망하기 시작했다.” 돈을 댈 수가 없는 거야 낭중에. 중간에 손들어버렸어. 심상복 서커스단이 제작자가 망하니까 중국에 갈 돈이 없는 거야. 그래서 동물을 다 팔고 겨우 차비 해서 자기네 나라로 갔어. 7
극동흥업을 떠나려던 김기덕 감독, 변인집 촬영감독과 그는 차태진 대표의 간곡한 부탁으로 영화사에 남아 극동흥업을 재기시킨다.
박진수: 청춘물 하기 시작했다고 청춘물. 뭐했냐면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이니 <떠날 때는 말없이>(김기덕, 1964)니. 작품들이 많이 있잖아요, 청춘물이. 청춘물 했다하면 히트치는거야. 아카데미 극장에 붙이고 그랬는데. 망했다가 다시 나와 가지고 또 이제 일을 또 많이 하니까 돈을 많이 벌었어. 8
[사진 5]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의 한 장면
[사진 6]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김기덕, 1964)의 한 장면
재기에 성공한 극동흥업은 김기덕 감독 외에 유현목, 이형표, 정진우, 임권택, 강민호 등 많은 감독들에게 작품을 의뢰했고 이 작품들의 조명은 거의 다 그가 맡아 책임졌다.
박진수: 60년도 초에 극동 시작서부터 계속 일을 1년에 뭐 거의 한 10여 작품씩 했으니까. 9
극동흥업에서 많은 감독들의 다양한 장르영화들의 조명을 맡았지만 그 중 1967년 김기덕 감독의 특수촬영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는 특히 인상에 남는 작품이자 조명 장비가 열악했던 당시 환경에서 그에게 도전이 된 영화였다.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의 조명 기자재 상황은 김성춘이 1942년 일본 아라시간주로 프로덕션에서 수입해 온 조명기, 북한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 국방부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커다란 소련제 조명기와 1956년 아세아재단에서 원조해준 50키로 조명기, 손수 만들어 사용하던 수제 조명기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1963년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로 대종상 조명상을 수상하고 일본에서 열린 아세아영화제에 참석한 뒤 일본 대영촬영소에서 조명연수를 받게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기자재였던 시네킹 조명기를 들여오게 된다.
광량을 10배나 증폭시킬 수 있는 시네킹 조명기의 도입은 획기적이었다. 영화계에 조명기자재의 부피를 줄이는 동시에 광량을 높이는 것은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인력과 발전기에 대한 부담도 줄고 특히 로케이션 밤 촬영에서의 어려움을 확실히 줄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조명감독들은 필요한 조명기를 직접 제작하는 방식으로라도 조명기를 충당했어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화영공작소라는 수공업적 방식의 공작소가 조명인들에게 항상 회자되는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화영공작소의 대표였던 김종철도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조수로 일하던 시절의 이력을 바탕으로 조명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조명제작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또한 많은 양의 조명을 이곳에서 주문하여 제작하였다.
<대괴수 용가리>에는 많은 양의 조명을 주문 제작했어야만 했다. <대괴수 용가리>는 특수촬영물로 미니어처세트를 이용하였고 고속촬영을 통해 느린 화면을 만들어야 했다. 고속촬영을 위해 카메라의 회전수가 증가하는 만큼 더 많은 광량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당시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전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양의 조명을 만들어야 했다. 결국 실내촬영에서도 발전차를 동원하여 근근이 여러 달에 걸쳐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특수촬영과 미술에 관계된 일본의 스탭들이 초청되어 제작을 도왔고 처음 시도하는 고속회전촬영 조명에 대해 그는 일본 스탭들의 자문을 빌어 작품에 참여하였다. <대괴수 용가리>는 그를 포함해 국내 영화인들이 특수촬영과 미술에 대한 기술을 전수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 7]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의 한 장면
[사진 8] 영화 <대괴수 용가리>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그는 1972년 영화계를 잠시 떠나게 된다. 영화가 사양길에 접어든 시기였기에 그는 당시 새롭게 부상하는 매체였던 컬러텔레비전에 대한 학습과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장인인 조택원 선생의 도움으로 1974년 일본의 후지 텔레비전에서 컬러 조명에 관한 연수를 받는다.
박진수는 연수를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방송국에 들어가려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신상옥 감독의 권유로 다시 영화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1979년은 이미 영화산업이 점점 쇠퇴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후배의 권유로 MBC 광고제작사업부에서 광고 조명 담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이후 광고조명 독립사업체를 운영하다 은퇴할 때까지 광고계에 적을 두게 된다. 그는 같은 조명이지만 영화는 그림자를 아름답게 표현해야 하는 예술이고 광고는 그림자를 지워 보이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상반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무대와 영화, 텔레비전, 광고 등 다양한 매체를 모두 경험한 그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조명을 담당할 수 있다며 자신의 실력을 자부한다.
1995년에 그는 한국영화조명감독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1년 동안 회장으로 지내며 왕성한 활동과 성과를 만들어냈다. 어렵게 협회의 사무실을 얻고 후배들의 일본 기술연수를 진행했으며 1996년 조명아카데미를 설립해 후학들을 양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놓았다.
평생을 조명과 함께해 온 그는 영화와 조명의 관계를 그림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감독이 화폭을 만들어놓고 촬영기사가 그 화폭을 담는 역할을 한다면 조명기사는 빛으로 화폭에 붓질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런 조명의 중요성을 설파하고자 그는 후진 양성을 위해 기술연수를 추진하고 전문교육기관을 만드는 역할에 열정적으로 매진하였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조명기사로서 다양한 매체를 섭렵하고 화려한 이력을 지닌 그는, 지금은 일선에서 은퇴하였 지만 '기술자는 정년이 없다'는 말로 영화조명에 대한 의지와 미련을 남겼다.
1) 배수경⋅박진수, 「박진수-조명」, 『한국영화사 구술총서04 한국영화의 르네상스3: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상자료원, 2007, 181쪽.
2) 위의 책, 181쪽.
3) 위의 책, 184~5쪽.
4) 위의 책, 189~190쪽.
5) 위의 책, 199쪽.
6) 위의 책, 200쪽.
7) 위의 책, 200~201쪽.
8) 위의 책, 202쪽.
9) 위의 책, 202쪽.